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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Dec 21. 2020

사색87. 전환

5월 18일(일)

내 인생에서 이 시간은 뭘까. 마냥 기다림?,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대응하는 태도 함양? 여러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의미를 가진 시간으로 승화하려 하지만, 사실 무기력, 무료함으로 채우고 있다. 정확하게는 무의미하다. 무의미하니 불안하다. 무의미하게 시간을 보내도 괜찮은가. 어쩔 수 없잖나. 내가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그러니 불안해할 필요 없다. 답답함이 불안감으로, 일하고 싶은데 할 수 없으니 곧 사장 면접 마치고 취업할 줄 알았는데 여기까지 와서 아무 소식이 없는 게 불안하게 만드는 것 같다. 이 시간의 의미는 무료함, 무의미, 불안함, 답답함에 따른 감정의 동요가 의식을 거의 채우고 있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필연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면, 우리는 그것들로부터 감정적인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

철학자 스피노자(Spinoza)가 말했다. 실직이 내 인생에서 필연이라면 실직자라는 걸 가슴 졸일 필요 없고, 면접 본 곳에서 연락 오지 않는 것도 실망할 거 없지 않나. 다른 결과는 처음부터 불가능했을 테니까. 인생사에 필연을 이해한다면 실직당했다는 걸 덜 부정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만, 필연에 내가 바꾸기 위해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면, 여기에 분노, 불안, 실망의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절대로 바꿀 수 없는 사실에 대해서는 그런 감정은 느낄 필요 없지 않나.       


만약 실직이라는 사건이 우연이라 해도 ‘내가 실직당할 줄은 전혀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할 수만은 없다. 연일 뉴스, 신문에서 나오는 실업률이, 적어도 경기가 좋지 않다는 소식에 익숙하다면, 내게도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인정하면서 내게 일어날 가능성 또는 확률이 극히 낮다고 회피했다고, 실직을 예상하지 못한 걸 꼭 내 잘못이라고 할 수도 없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예측하지 못한 일을 만날 때 그게 나에게 좋은 일이라면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나쁜 일이라면 내가 알지 못하는 무언가의 부정적 의도에 휘말려, 저주를 받아 일어난 일이라고. 반면에 적극적이고 분명했던 여러 징후를 의도적으로 외면하진 않았을까. 갑작스럽다, 전혀 낌새 채지 못했다 했지만, 이제야 차근차근 회사 사람들의 말투, 표정들을 복기해보니 해고 전에 분명한 징후가 있긴 한 것 같다.       


현대 자유 경제 사회에서 실업, 실직은 보편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서 ‘보편적’이라 해서 우리 모두 실직당할 수 있다는 게 실직을 바라보는 데 더 좋게 만들까. 더 나쁘게 만들까. 내가 언젠가 실직당할 것이라는 사실은 분명 나쁜 것이다. 그런데 우리 모두 언젠가 실직당할 것이라는 사실은 실직을 더 나쁜 것으로 만들까. 아니면 남들도 당하는 일이라, 보편성에 따라 나에게 위안을 줘서 좋은 것이 될 수 있나. 나 혼자만 당한다면 가혹한 형벌 같지만, 모든 사람의 공통된 운명이라면, 운명이라 하면 보편이라기보다 필연적인데, 우린 조금 위안을 얻을 수 있을 듯한데. 참 못됐다. 한편, 사건을 필연, 보편이라고만 본다면 오히려 무기력해지지 않을까. 필연적, 보편적인 실직이라 해서 위안되지는 않을 것이다. 필연인가 우연인가가, 개인의 일인가 보편의 일인가가 내 기분의 좋고 나쁨에 대한 변수가 아니다. 기분은 무엇보다 현재 ‘상황’에 따라왔다 갔다 하니까. 그렇게 보면 전쟁, 기근, 독재 같이 거대 사건이 미약한 개인의 인생에 들이닥친다면, 예전 어른들은 필연성, 보편성을 인식하고 다들 그렇게 사는데 하며 견딜 수 있었나 보지만, 나에게 그런 필연, 보편성은 거대 사건을 전혀 견딜 동력이 되지 못할 것 같은데. 전쟁 영화에서 병사나 포로가 고난을 견디는 영화를 보면 볼수록 나 같으면 그냥 죽어버리는 게 낫겠다, 저걸 어떻게 다 견디나 하는 생각만 든다. 보편성, 필연성 말고도 저걸 견디게 하는 무언가가 있는 걸까. 


실직이, 부정적인 어떤 사건, 본질적으로 필연이든, 우연이든, 보편이든 우리 인생에 분명 존재하고 개인의 삶과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친다면, 이를 어떻게, 주체적으로 대응할지는 개인의 삶의 방식으로서, 사회 재생 차원으로도 중요하다. 지금 내가 이 중요성을 인지하는 합리적인 상태라고 가정하면, 실직 기간 동안 나는 실직을 극복하고 재취업했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솔직히 분명 중요하긴 한데, 인생에서 어떤 부정적인 사건을 어떻게 주체적으로 대응하니 기분이 좀 좋아지더라 하는 노하우를 쌓는 게, 계획한 것 말고도 인생사의 여러 가능성을 상상해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지 않을까. 앞으로 이런 일이 또 있을 확률이 낮지 않다는 건 구역질 나지만, 자명한 일이니. 견딜 수 있는 그 무언가를 찾아야겠지. 불안해 하지만 말고.      


일요일이다. 교회로 간다. 셔츠와 면바지로 단정하게 입고, 왁스를 머리에 바른다. 평소에 교회라는 성스러운 곳을 잠바 하나 걸치고 세수도 하지 않고 갔는데, 오늘따라 단정하게 가고 싶어 하지도 않던 치장을 한다. 주일 예배가 곧 시작한다. 오늘 성도 대표기도를 하실 분이 갑자기 오지 못하게 됐다며, 나보고 좀 대신해달란다. 평소처럼 츄리닝에 잠바 입고 왔으면 어쩔 뻔했나. 필연이 가보다. 대표기도를 하는 줄 알면 보통 원고를 미리 준비하는 데 갑작스레 하는 것이라, 아무런 준비 없이 요즘 내 화두인 불안, 두려움에 대한 생각으로 읊는다. 불투명한 우리들의 미래, 내 기대와 다른 현실을 마주하게 되면 두려워하지 않고, 어떻게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도록, 우리가 계획한 것 말고도 인생사의 여러 가능성을 고려할 수 있도록, 여러 일을 견딜 수 있도록 기도하며 하루를 보내게, 앞으로 일주일을 잘 보내고 여기서 우리 다시 만날 수 있게 하나님 살펴달라고 마친다.      


미국 넷플릭스에 제작한 정치 드라마 <하우스 오브 카드, 시즌1>에서 주인공인 정치인 프랭크 언더우드는 이유를 알 수 없는 고통은 못 참겠다, 가치가 없다며, 그런 가치관은 차에 치어 다 죽어가는 개는 직접 그 숨을 끊어주는 게 용기라고 말하고 실행한다. 그런데 도대체 원인을 알 수 없는,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 너무 많다. 실직 수준의 고통은 비견할 바도 아닐 정도로 심각하게 병들어 아파하는 사람, 갑작스러운 사고를 당한 사람, 그 가족. 이런 고통에 대해서는 프랭크 언더우드의 한정적인 명철에 따른 대응법을 실행하기 어렵다. 이런 고통을 마주하면 문제의 해결이 신앙 차원으로 승화되지 않을까. 인간적인 차원으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으니까.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이해할 없으니까. 거룩한 차원의 것이 어떤 개선을 위해, 진보적 성찰을 위해 마련된 차원 높은 이유가 있을까. 아니, 오히려 이해가 도통 가지 않는다면 가지고 있던 신앙을 버릴 수도 있을 법하다. 신앙으로 승화하거나, 아니면 신앙을 버리거나. 지금 내 생각으론 두 가지 선택이 등가해 보인다. 가장 힘들 때,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 신에게 의지하지 않고 인간적인 차원에 머무른 다면 그건 오히려 더 비현실적인듯하다. 과연 자기의 명철로 고통을 이해, 감당할 수 있을까. 보통은 상황을 참아낼 수밖에 없지 않나. 이해는 나중의 문제, 그렇다면 잘 참는 게 필요한데, 그때 신앙으로 내 인생 이상의 거대한 지도를 찾아보고, 또 미시적이고 현실적인 대응으로, 그동안 얼마나 내 계획에 의존하는 삶을 살아왔는지 돌아보며, 그렇지 않은 점들을 찾는, 내 계획대로만 사는 것을 그만두는 것, 이게 사실은 중독을 끊는 수준으로 어렵다. 성공하는 삶을, 계획대로 진행된 삶을 살아왔을수록 내 계획을 포기하기 어렵다. 실패 자체가 사람을 더 성공적으로 만드는 것일까, 그 실패에 대응하는 과정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일까. 신앙심은 가장 말도 안 되는 상황 속에서 타당해지는 것 같고,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이런 패턴을 보이는 건 자연스럽다. 그래서 문제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많다. 오히려 문제없는 사람들이 가득한 교회는 교회라기보다는 차원 높은 사교모임, 또는 내세에 대한 보험 가입 클럽에 가깝다.      


통제할 수 없는 영역에 대한 대응에 정답은 없다. 정확하게는 정답을 알 수가 없다. 사례가 워낙 다양하다. 그렇다면 질문을 잘해야 한다. ‘왜’ 나에게, 도대체 이 기간은 ‘언제’ 끝나나. 이렇게 ‘왜’, ‘언제’라는 질문은 답도 알 수 없는, 이는 질문 자체가 좋지 못하다.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낼 것인가. ‘어떻게’가 변수다. 이 상황에서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건, 내가 어떻게 이 시간을 보낼 지에 달려있다. 다른 건 몰라도 (내가)  ‘어떻게’는 통제할 수 있다. 이 실직이 이제 80여 일이 넘어 90일에 가까워진다. 그동안 지난 80여 일을 알 수도 없는, 답도 없는 왜, 언제라는 질문으로만 채웠다. 앞으로 어떻게라는 자세로 대응할 것이다. 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이번 사색은 셸리 케이건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다케우치 케이의 <우연의 과학> 책에서 일부 영감을 얻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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