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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Dec 24. 2020

사색88. 계획 변경은 상수

5월 19일(월)

모르는 것과 아는 것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무엇인가, 무얼 알아야 하나, 뭣을 알고 있어야 하나. 아는 것을 실천하지 않는 것은 알아야 할 것을 모르는 것보다 더 심각하지 않을까. 알아도 실천하지 않는 것은 모르는 것과 다를 게 있나. 모르면 몰랐다 할 수 있지만, 그것도 서른 중반 즈음이면 어른으로선 할 수 없는 변명이고, 알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는 걸 어떻게 평가해야 하나. 나쁘다고만은 할 수 없는데.      


실직 기간에 ‘어떻게’ 하자는 태도로 대응하자고 결심했지만, 순간순간 ‘왜’, ‘언제 끝날까’하며 관성적인 질문들이 이어져 ‘어떻게 하지’를 놓치고 만다. 난 짤렸는데, 지금 직장도 없잖아 하며 털썩 마냥 하던 데로 하루를 포기하고 싶다. 왜, 언제라는 푸념과 함께.      


썩,

예를 들면 하루 종일 누워있기, 유튜브 보기, 멍 때리기로 하루를 죽인다. 더욱이 신앙인이라면 이 하루가 얼마나 귀한 하루 인가 알면서도, 돈으로 환산해도 이 비싼 하루를 마냥 죽인다. 살인범에게 연속하는 살인은 매 살인 순간에 자신이 한 행위가 이게 살인이야, 난 살인자야 하며 충격받을까. 그렇게 하루를 죽인 그날 저녁에는 그 하루를 보낸 게 안타깝지만, 어제 오늘 내일모레 그날그날 죽이던 걸 연속하면 죽였다는 게, 죽이는 게, 또 죽일 게 둔감해지지 않을까. 특히 내가 전혀 원하지 않은 실직이라는 상황에서는 하루를 살리는 것보다 지금 내 우울함을 뭐로든 해소하려는 게 더 우선순위이다. 유튜브를 볼 수밖에 없다.     


유튜브를 본다. 영어가 어느 정도 들리기만 하면 유튜브로 방대한 자료를 접근할 수 있다. 흥미위주로만 보기도 하지만, 유튜브는 교육 자료로도 방대하다. 스쿼트 운동부터 치과의사 대상의 사랑니 빼는 법, 팔꿈치 테니스 엘보우 환자의 외과 수술, 이발소 면도하는, JFK살인에 춤추는 총알에 대한 음모론까지 별별 자료가 다 영상으로 있다. 유익한 자료도 많지만, 저질스러운 것 역시 방대하다. 유튜브는 하나의 영상을 마치고 나면 관련한 영상을 즉각 링크해준다. 그렇게 영상에 영상을 이어, 3~10분짜리 클립을 이어서 보다 보면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보고 있다. 유튜브 자체가 재밌기도 하지만, 현재 괴로운 내 의식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른 자극에 집중하게 된다. 영상 자극으로 뇌에서 도파민이 다량으로 분출하는 듯하다. 중독 증세가 나타난다. 실직자라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덜컥 밀려오면 침대로 가서 누워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재생한다. 뭐든, 어떤 영상이든 이어 이어간다.      


면접자로서 면접을 보는 건 개인의 역량이지만, 채용 결과는 역량 밖이다. 역량 밖에서 애태우지 말고, 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위시리스트에 있던 독서, 드럼 레슨, 세무 관련 자격증, 해외여행 등 통제할 수 있는 걸로 시간을 채워야 할 텐데, 이런 영역에 대해선 아무런 실천 하지 않고, 못하는 것만 가지고 시간을 죽이고 있다. ‘할 수 있는 걸’ 성실하게 진행해야 한다, ‘어떻게 해야 하는가’는 알고 있는데, 여전히 실천하지 못하고 있다.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말은 쉽지만, 이성적으로는 충분히 가능한데, 계획도 이미 세웠는데, 실천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덜컥 밀려오는 두려움, 혹시 이 실직이 영원하지 않을까, 내가 왜 실직자가 돼야 하나, 하며 ‘어떻게’와 ‘왜’ 사이를 왔다 갔다 하다 하루해가 저문다.     

 

실천을 이끌어 내는 건 ‘한걸음’이더라. 일단 침대 밖으로, 내 방 밖으로, 내 집 밖으로 한걸음 걸어가 실천을 시작한다. 성경 창세기 요셉의 억울한 옥살이 감옥 같은 내 방에서 한걸음 밖으로 나가는 거다. 한 걸음 걸으면 그다음 걸음, 그다음 걸음 자동적으로 걸어지더라. 그러다 보면 뭔가를 실천하고 있다. 실직자에게 내 집, 내 방이 심정적으로는 지옥 같지만 가장 편한 곳이다. 내 집만큼 좋은 곳이 어디 있나. 하루 종일 누워있는데, 다만 불편한 건, 내 마음에 감옥이 있기 때문에, 이 마음에서 탈출하려 이 방을 나서본다. 이 한걸음 나서는 게 하루를 살리는 용기, 한걸음에 얼마나 큰 용기를 내야 하는지. 실직 중인 나에겐 집 밖으로 한 걸음, 이 의미가 엄청난데, 거리의 사람들이 성큼성큼 걸어다는 걸 보면 길 위에는 엄청난 기적들이 일어나고 있는 거다. 도시의 도시인들의 걸음은 얼마나 큰 기적인가. 횡단보도를 걷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걸음을 살펴보며 이 얼마나 용맹하고, 하루를 귀한 기적들인가 감탄한다. 길에서 우와우와 감탄하고 있으니, 남들 보면 정신병 증세인 듯.     


음, 나서봐야 도서관. 그렇게 한걸음 간다. 귀에 꽂은 음악이 갑자기 멈추고 전화벨이 울린다. 기적의 걸음을 멈추고, 호주머니에 들어있던 핸드폰 액정을 꺼내 본다. J회사 번호다. 사장 면접이 늦춰진, 그렇게 기다리던 전화가 일주일이 넘어 울리고 있다. 채용이 취소됐다는 걸까. 전화를 받는다. 내일 오후 사장 면접을 보잔다. 알겠다고 한다. 그렇게 기다리던 전화를 받았는데, 기분이 좋지도 나쁘지도 않다. 물론 내일 면접 잘 봐서 채용되면 좋지, 그런데 과연 돼도 좋은 건지 궁금하기도 하다. 애태우며 기다린 게 이건대, 그렇게 기다린 게 이건가 싶기도 하다.      


도서관으로 가는 걸음을 미용실로 옮긴다. 머리가 지저분해서 정리하련다. 그래도 사장 면접인데. 헤어디자이너께 내일 면접 본다 잘 부탁드린다고 말한다. 디자이너는 자신의 면접처럼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도록 머릴 다듬어주더라. 나가는 길, ‘면접 꼭 잘 보세요~’하고 응원하더라. 실업 시대, 면접 본다면 누구든 뭐든 잘해준다. 면접자가 왕이다.      


이번 실직기간 동안 몇 번을 확인했지만 인생은 생각대로 굴러가지가 않는다. 지난 실무진 면접 후 이제 착착 재취업할 줄 알았고, 사장 면접 연락이 없어 채용이 취소돼 끝난 건 줄 알았는데, 내일 사장 면접을 본다. 앞으로 내 계획을 세우긴 해야 하되, 그게 생각대로 돌아가지 않을 수, 틀릴 수 있다. 아님, 계획을 아예 하지 말까, 그게 더 쉬울지 모르겠다. 인생에서 계획을 세웠다면 '수정, '변경'은 상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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