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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Dec 28. 2020

사색89. 사장 면접

5월 20일(화)

편안하다. 면접 직전이면 헛구역질이 나올 정도로 긴장했는데, 편안하다니 이젠 이골이 났나 보다. 인생 길게 보면 이거 아무 일도 아닐 수도, 이 시간이 내 인생을 딱 뭐라 결정짓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연함을 가져본다. 하지만 오늘 사장 면접을 끝으로 곧바로 출근하고 싶다. 긴장감과 무기력의 반복, 이젠 지겹다. 오후 4시 면접이다. 점심 먹고, 양복을 찾아 입고, 오늘 조간신문을 읽고, 잠깐 기도하고 나선다.   

  

15분 전에 도착해서 회사 회의실에서 대기하고 있는데, 면접 차림세의 여성 한분이 들어온다. 경쟁자? 최종으로 나만 면접 보는 줄 알았는데, 경쟁자가 있는 건가. 채용이란 게 아무리 회사 마음이지만 사장 면접인데 경쟁자랑 한 방에 넣어놓고 얼굴을 마주하면서 기다리게 하다니. 저쪽도 내가 경쟁자, 불편한 사람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차린다. 회의실을 채우는 미묘한 분위기, 나이스 한 척 “사장님 면접 보러 오셨어요? 면접 잘 보세요!” 할 수 있지만 저 사람이 면접을 잘 보면 난 죽는 거 아닌가. 시선을 계속 허공에 둔다.      


날 먼저 부른다. 경쟁자보다 먼저 들어가는 건 서류상으론 내가 우선하다는 것일까. 문을 여니 사장이다. 그렇게 기다렸던 J회사 사장님이다. 나이 많은 노인, 자수성가한 기업인의 뉘앙스가 느껴진다. 이런저런 이야기 중 내가 현재 채용 분야에 경험이 없다는 것을 재차 물어보더라. 20분가량 면접을 마무리하면서 마지막으로 할 말 있냐고 하는데, 보통은 특별히 할 말 없다고 하는데 오늘따라 의연함이 분출했나 한마디 한다.


“사장님, 간단히 1분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가지입니다. 면접 중에서도 채용 분야에 경험이 없다는 것, 제가 이 분야 경력이 5년인데 그걸 바탕으로 해당 영역 실무를 빨리 착수할 수 있는 역량은 있습니다. 제가 ‘빨리’라고 했는데 시간으로 말하면 1 달이고, 최초 업무보고 1회 경험하면 순조롭게 적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예전 회사에서 지금 회사와 비슷한 시장을 대상으로 일한 경험이 있습니다. 따라서 영업대상에 대한 개념적인 접근이 아닌 지리적, 체험적 현황을 이미 파악하고 있습니다. 이는 혹 이 자리의 다른 후보자와 비교해도 저를 쓰실 이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 우리 회사와 경쟁 구도에 있는 회사에서 일한 경력이 있는데, 사실 제 입장에서는 사장님 회사에서 일하는 게 LG전자 있다가 삼성전자로 이직하는 느낌입니다. 2등 하다가 1등 회사에 들어갈 수 있는 기회입니다. 이건 제게는 엄청난 기회이며, 이 기회를 이 정도면 내가 채용되겠지 하면서 마냥 기다리고 있지 않겠습니다. 기회를 주시면 더더욱 준비하며, 채우며 일하겠습니다.”


사장의 눈빛이 이놈 할 말 있다고 해서 기대하며 들어봤는데 별거 없네 하는 느낌이다. 회사를 나서는데 이전 실무진 면접을 본 면접관 한 분이 나와서 배웅해준다. 본인은 나랑 일하고 싶다고, 사장이 이번 인사에 또 다른 자격 취향을 이야기해서 당신 면접이 끝나고 새로운 후보군을 좀 찾아보느라 연락이 늦었다고, 그리고 그 여자가 그 후보라고 말하더라. 면접관이 면접자에게 이런 이야기까지 해주다니, 내가 애타게 연락을 기다렸던 시간이 이런 사정이었구나. 여하튼 좋은 결과를 기대한다며 헤어진다. 사장께서 이번 인사의 자격에 대한 다른 선호가 있었다니 사장 면접이란 거의 끝난 관문이 아니라 훨씬 더 어려운 관문이구나. 그렇게 면접을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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