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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Dec 30. 2020

사색90. ‘왜’ 보다는 ‘어떻게’

5월 21일(수)

편한 늦잠을 자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압축한 스프링이 튕겨나가듯 침대에서 뛰쳐나와 전화기를 찾는다. J회사 전화번호다. 면접 결과인가. 목소리를 가다듬고 여보세요 하니, 오후 2시까지 회사로 올 수 있냐고 한다. 사장께서 다시 한번 더 보고 싶단다. 끝난 게 하니라 한 번 더 보자니,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기왕에 노골적으로 물어본다. 오늘은 저 말고 다른 분이 있나요? 을도 아닌 병, 정 급인 지원자의 예상하지 못한 질문에 갑 중에 갑, 면접관은 당황, 멈칫하더니 ‘없다’는 대답을 해준다. 그럼, 오후에 뵙자 하고 전화를 끊는다.     


마음은 느긋하다. 이제 진짜 거의 다 온 건가. 이 실직 기간이 끝나는 건가. 한편 만약 이게 아니라면 또 새로운 기회를 고통스럽게 모색해야 할 텐데, 견딜 수 있겠나. 최종 결정은 내 몫이 아니라 내 밖의 영역, 그걸 믿고 신뢰하자는 신앙심이 생겨 평소와 다른 안정감을 준다. 뭐, 거의 될 듯, 끝날 것 같으니까 신앙이 생기는 건가. 아버지 여름 양복을 꺼내 입는다. 지난여름, 고향집 장롱에 덩그러니 걸려 있는 아버지 입으시던 검은 여름 양복을 내 몸에 맞게 수선했다. 어머니는 고향집에 놔뒀으면 하셨지만 아버지의 옷을 입는 게 아버지를 좀 더 느낄 수 있어, 이걸 입고 일하면 아버지의 인생을 다시 재현하는 것이라며 옷을 서울로 가져왔다. 캠브릿지 멤버스, 검은색 클래식 핏트. 그걸 입고 마지막, 제발 마지막 면접을 보러 간다. 아버지와 함께 걷는, 아버지를 느끼는 기분이다.      


회의실에 앉아 사장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여직원 한 명이 와서 ‘등록 때문에 몇 가지 좀 물어볼게요’하며 내 신원에 대해서 몇 가지 묻고 간다. 등록이라니, 면접 보러 왔는데 무슨 일이지, 이미 확정됐다는 말인가? 긍정적으로 혼란스럽다. 그러자 실무 면접을 봤던 차장이 들어오더니, 오후에 사장께서 면접을 다시 보자고 했는데, 사장이 자기 보고 알아서 결정하라고 나갔다며, 자기는 나와 함께 일하는 걸로 결정했단다.       


나. 채용 부문에 내 경험을 확인할 수 없지만, 여러 가지로 검토해서 잘할 거라 판단했다고, 경력직이지만 수습기간을 두고 채용 결정을 번복할 수도 있으니 잘해달라고 하더라. 한두 달 안에 나의 근무 역량을 재평가하겠다는 재수 없고, 무서운 말을 한다. 경력직 근무 역량을 한두 달로 평가 판단한다는 게 얼마나 한심한 짓인가. 홈런을 매번 칠 수 있나? 결정적일 때 한번 친 홈런, 그런 홈런을 기대하면서 선수를 한 시즌 동안 타석에 넣는 건데. 또, 내가 홈런을 매번 치는 타자면 이 회사에 오겠나, 더 좋은 회사로 가지. 다시 평가하겠다는 언급에 짜증 났지만, 놀랍구나 벌써 짜증이라니, 업무 파악은 한 달이면 충분히 감 잡을 수 있다고 자신한다.        


회사를 나서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다리는 데 날 짜른 전 회사 사장이 보인다. 이 바닥이 워낙 좁아 돌고 돌다 결국 만나게 된다 하지만 이리 빨리, 지금 저 사람을 만날 줄 몰랐는데. 마주치기 싫어 얼른 길을 돌아 다른 길로 갔는데 또 다른 코너에서 오는 사장과 마주친다.      

“어, 웬일이셔”

웬일이긴 여기 다시 일하러 왔다, 그동안 복수의 칼날을 갈았던 것처럼 얼굴에 침을 뱉고, 바깥다리를 걸어 넘어뜨려, 오줌을 갈겨 버리고 싶지만 그럴 용기뿐만 아니라 무술 실력도 없어 모기만 한 목소리로, 이러이러해서 J회사에 출근한다고, 그런데 사실 J회사는 사장의 회사와 매출 영역이 약간 겹치기도 해서, 어떻게 보면 경쟁사이기도 하다. 사장은 순간 안색이 변했다가 허허 잘됐다며 사무실에 놀러 오라고 하더라. 내가 거길 왜가.   

   

저녁에 김효현, 정지인과 학교 운동장에서 만나 함께 달린다. 6바퀴째 달리다가 나 오늘 면접보고, 내일부터 다시 출근한다고 호흡과 함께 말을 뱉는다. 두 사람은 달리기를 멈추고, 야호, 재취업을 축하한다며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한다. 이제 나는 새로운 곳에 출근한다는 게 마냥 기쁘기만 한 일은 아니게 됐는데, 두 사람에겐 기쁜 일이다. 끝까지 달리기를 마치고, 몰아쳤던 숨을 가다듬고 나서 이 기간 동안 고민한 걸 정리해서 두 사람에게 이야기한다.      


"우리 인생은 안정을 추구하지만, 사실 인생이란 건 불안정하다. 불안정한 게 자연스럽다. 물론 어떤 사건으로 인해 안정이 파괴되고, 불안감으로 출렁거리는 걸, 그 출렁거리는 높이는 다양하지만, 문제로 접근하면 마냥 한 없이 높은 파도 같은 게다. 깨진 안정 속 인생을 불안감으로만 대응하면 피곤해서 못살게다. 불안정한 걸 어떤 믿음에 대한 신뢰, 무언가를 믿어내는 ‘믿음’으로 대응해야 할 것이다. 그게 신앙인이라면 종교적인 믿음 일 수 있고, 아니면 자신의 목적에 대한 신념일 수도, 아니면 자신의 고유한 실력으로 견딜 수도, 아니면 억울한 일이 일어났다는 운을 탓할 수도. 그런데 불안정한 걸 줄여주는 믿음이란 게 일정 수준으로 유지하지 못한다. 수치로 말하면 어떤 날은 늘었다 어떤 날은 줄었다 하는 있는데, 그 변화의 편차가 클수록 불안감을 통제하지 못하는 거고, 편차를 줄여 일정하게 유지하면 그게 또 다른 안정감을 형성하는 것, 편차를 줄이는 것이 우리가 요구하는 안정이라는 것 아닐까. 우리 앞으로 이런저런 일 또 있을 텐데, 함께 달리기 하며 서로의 불안감을 줄여 줄 수 있는 달리기 동료, 늘 하던 것을 같이해주는 서로에게 어느 정도는 필요한 사람이 되자" 고 말한다. 편차 이야기를 해서 그런지 수학을 공부하는 지인이가 굉장히 공감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김동식 목사님께 전화한다. '오, 예~' 하며 기뻐하신다. 김 목사님과 이 시간을 함께 보내서 기뻤다고, 감사드린다고 말한다. 김 목사님은 다음에 또 짤리면, 또 같이 테니스 치자고 하신다. 다음에 또 잘린다... 라니 아직은 그런 장르의 강렬한 농담을 받아내지 못하고 어색한 웃음으로 하하하고 얼버무린다. 선지자 입에서 다음에 또 짤린다... 라고.     


오전 6시 기상 알람을 맞춰놓는다. 오전 6시 기상이라, 내일 아침이면 다시 출근이다. 실직도 예상하지 못한 갑자기 일어난 일이지만, 내 실직 사색들을 기록하는 일도 이렇게 갑자기 끝날 줄이야. 실직으로부터의 사색은 재취업과 동시에 오늘부로 끝이다. 빨리 끝내고 싶었지만, 이 기간 동안 무엇보다 고민했던 ‘언제’라는 질문에, 오래전부터 ‘끝은 있다’라는 마냥 모호한 해답은 알고 있었지만, 끝은 있다는 걸 체험한다. 이 실직 기간의 끝은 있었다. 또 하나의 질문이었던 ‘왜 나에게’에 대한 해답은 찾지 못했지만, ‘왜’라고 하기보다는 ‘어떻게’라고 질문하며 대응을 모색하는 게 더 좋은 질문이라는 걸 해답으로 도출해낸다. 각각 질문에 대해서 구체적인 정확한 해답을 찾은 걸까. 나만의 해답일 뿐인가. 다른 실직자들은 어떤 질문에 어떤 대답으로 실직의 하루를 채우고 있을까. 다만 실직 기간뿐만 아니라 다른 기간에도, 좋은 질문으로 인생을 채워야겠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통해 얻어낸 답을 앞으로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면 해답으로 적용해나가야 할 것이다. 물론,적용에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의 차이를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번 실직 기간에 타인으로부터의 작은 베풂이 있었다면 그것은 신앙이 구현한 신적 사랑의 재현이며, 그로 인하여 나는 이 기간을 살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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