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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Dec 31. 2020

맺음말

2014년 2월에 실직해 90일 동안 사색을 마치고 다시 취직한 J회사, 거기서도 7개월 일하고 12월에 짤렸다. 잦은 해고는 근무행태의 문제를 방증하는 듯하지만 첫 실직과 동일하게 여전히 해당 직종의 괴상한 고용형태의 결과이기도 하다. 


취직도 어려운 시절 두 번이나 실직한 건 능력 있는 거라더라. 위로 차하는 말이지만 그런 능력은 사양한다. 실직이라 하지만 스스로 쓴 사표도 아니고, 합리적인 결정도 아니다. 물론, 해고가 잦은 직종이라 하지만 한해에 두 번 당하는 건 흔한 일이 아니다. 황당하기 만한 일을 당하니 안 하던 짓을 하게 되더라. 국민학교 졸업 후 쓰지 않던 일기를, 하루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 책은 첫 번째 실직 후 90일 동안 하루하루의 기록을 묶은 것이다. 불안감에 붙잡혀 과감하고 진취적인 실행을 하지도 못했다. 방에서 생각만 했다. 지금에사 그게 안타깝다고 하면 그때 하루하루를 견딘 내게 서운한 말이다. 실직자의 하루, 긴 하루 동안 의식을 켜놓고 유지한 게 대견하다. 다시 기록을 읽어보면 초반에는 의식이 토막토막 끊어진다. 문단에서 심지어 한 문단에서 감정의 기복을 느낄 수 있다. 불안감 속에 버팅기던 의식을 글로 표현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게 쉽지 않았나 보다. 후반으로 가면서 나름 사색이 깊어지고 글도 두꺼워진다. 하루가 반복할수록, 글이 두꺼워질수록 생각도 두꺼워지더라. 쌓여 가는 사색에 따라 미약하게 행동이 변한다. 기록의 연속에서 그걸 살필 수 있다. 이건 실직이라는 과중한 충격 후 무미한 하루를 견디며 겨우 붙잡은 의식, 흔적이 쌓인 것이다. 글에 서술한 이름들은 몇몇은 가명이고, 몇몇은 허락을 얻은 실명이다. 가명은 소설적으로 서술했고, 실명은 사실적으로 서술했다. 

       

두 번째 실직 기간은 지난 90일의 사색으로 얻었던 통찰, 통제할 수 없는 것에 대해 불안해하며 하루를 보내지 말자 했다. 적극적으로 시간을 메웠다. 당장 제주도, 장자도, 진해, 울진, 부안, 전주 등 국내여행을 떠났다. 4대강 자전거길 따라 자전거 국토 종주도 하고, 엔화가 싸지는 걸 보고 일본 간사이지방을 돌아다녔다. 여행의 즐거움은 일하는 것과 비교할 수 없지만, 집으로 돌아와서도 비교할 수 없는 실직을 견뎌내야 했다. 경험이 있다지만 역시 경험하기 싫은 실직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쓴 신영복 선생은 20년 동안 감옥에서 갇혀 살며, 사색하며, 훈련해서 자신의 인격을 완성했다 한다. 그런데 석방해서 친구와 만나 식사하는데 “어찌 너는 변한 게 하나도 없니”라고 타박하더란다. “변한 게 하나도 없다”라니, 20년 동안 감옥에 갇혀 인격을 완성했다는 신 선생의 자신감을 한 순간에 무너뜨리더란다. 인격의 완성은 혼자서 이룰 수 없다. 혼자만의 사색이니, 확신한 것을 적용하는 현장이 필요하다. 그리고 확신은 현장에 따라 변하게 마련이다. 


불안 속에 있고 싶지 않지만 역시 실직 기간 속에선 불안해질 수밖에 없더라. 좋은 연구는 연구자가 달라도 해당 연구를 반복해보면 똑같은 결과가 나온다. 이 책을 기록하면서 사색하고 다짐한 게 솔직히 두 번째 실직 기간에 도움이 되지 못했다. 신앙인으로 주식투자하지 말자 했던 다짐은 놀 바에 데이트레이딩이라도 하자 해서 일주일 만에 27%의 놀라운 수익을 내다가, 지금은 35%의 놀라운 손실을 보고 있다. 일요일마다 열심히 나가던 교회는 드문드문 빠지기도 했다. 신앙은 필요하지만 교회가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점점 확인하면서 예배보다 방에 앉아 상념에 젖기도 했다. 그렇게 실직이라는 것은 그나마 확신했던 것들이 변하고 마는 불쾌한 새로움이다.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폴 크루그만, 수많은 연구와 오피니언 칼럼에 따른 그의 주장을 간단히 말하면 “불황에 익숙해지라”는 소리다. 불황이라는 커다란 단위를 개인으로 줄이면 ‘월급이 줄어든다’ 거나 ‘실직당한다’는 것, 그런 일에 익숙해지란 경고다. 세계 최고의 경제학상을 받은 사람이 한다는 소리가 짜증 나는 소리다. <명심보감>에서 도둑질하는 친구를 감싸주기보다 ‘이 도둑놈’ 하고 잘못을 혼내주는 게 진짜 친구란다. 나쁜 행실에 대해 공정하게 지적하는 게 친구의 도리라고, 그렇다면 폴 크루그만은 꽤나 공정한 진짜 친구 아닌가. 실직에 익숙해져라, 그렇게 경고하던 바가 내게 일어났으니.


해고에 대응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노동조합으로 투쟁하거나, 부당해고로 법원에 소를 제기하는 등 구조적으로 대응하는 방법, 사람들도 있다. 나는 그렇게 구조적인 변화를 목표로 하는 용기 있는 사람이 아니다. 혹시 그런 분이 이 책을 보면 황당하게 나약한 인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일자리 시장의 문제점을 개선하기보다는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게 훨씬 이익이 있다 판단했고, 비교적 젊은 나이라 이직에 대한 두려움이 덜했기 때문이다. 쉬운 해고는 문제가 있지만 해고에 대응하는 방법이 법적 소송, 노조 투쟁으로만 일관하는 것도 건강하지 않다. 물론 내가 선택한 혼자 침대에 누워서 사색하는 게 정의롭지는 않지만 이런 선택이 실직에 대한 다양한 대응 중 하나 일 거라 생각한다. 


2015년 5월, 남들은 연휴를 즐길 때 경기도 부천의 한 아파트에서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자매 3명이 숨졌다. 그들은 실직을 비관해 “사는 게 힘들다”라고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세 자매 모두 미혼이다. 실직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현대 고용 시장에서 해고로 인한 실직은 일어나지 않을 수 없다. 일어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 하기보다 이미 일어난 일을 어떻게 대응해야 한다가 효과적이다. 내 경우는 침대에 누워 사색하는 게, 여러 다양한 대응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두 번째 실직기간은 9개월 지나 재취업했다. 어머니께 출근하기 전 “한동안 잘 놀았다”라고 소회를 밝혔다. 어머니는 그 기간을 잘 견뎌낸 내가 대단하다고 하시더라. 난 잘 놀았는데 남들 보기에는 견뎌낸 게 대단하다 할 정도인가. 실직이란 견딘 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나 혼자였으면 견디지 못했다. 주변에 사람이 필요하다. 적극적인 격려, 응원보다 같이 운동하며, 식사하며, 드라이브를 하고 함께 있어 주는 게 견딜 수 있게 한다. 실직은 절대적으로는 개인 문제지만 상대적으로는 비실 직자가 실직자를 위해 도움을 고려해야 할 공동체의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기독 신앙이 있다고 하지만 신앙이 좋은 건 아니다. 신앙을 있다 없다 뿐만 아니라 좋다 나쁘다 라 기술하는 게 특이하지만 다들 그렇게 말하며 서로를, 자기를 측정한다. 실직이라, 황당하기 만한 일을 당하니 안 하던 짓을 또 하나 했다. 구약성경 창세기를 읽었다. 고통 속에서는 종교를 찾는다. 종교를 가진 사람은 고통 속에서 더욱 신앙에 집중해본다. 갑작스러운 실직, 이해할 수 없는 사태를 견디는 데 종교가 효과 있다. 반면에 믿어왔던 걸 아예 등지기도 한다. 우리 사회에 고통이 늘어날수록 신앙인은 비례해서 늘어날까. 혹시 실직당하셨나? 무엇이든 집중하시라. 성경이든, 불경이든, 코란이든, 정신과 의사든, 프라모델 장난감 조립이든 손에 잡혀 집중할 수 있다면 다행이다. 거리에 수많은 교회가 있지만 실직자가 의지 할 교회는 별로 없다. 실직자에게 누구도 직접적으로, 지속적으로 위로하지 않는다. 자기 스스로 위로해야 한다. 그러니 혼자서 성경이라도, 무엇이라도 잡아라.     


89만 명이 실업자, 개중 20~30대는 53만 명이다(통계청, 2017.10). 경상남도 김해시 인구가 53만 명, 김해 인구 모두가 실업자 규모이다. 실직은 부부싸움에 경찰이 출동하듯, 지극히 개인 사이지만 지극히 나랏일이기도 하다. 89만 명의 일이면 이건 사회 문제이다. 실업급여, 취업프로그램 등 정부의 역할이 대응하고 있다. 그러나 실직자의 심리, 충격, 인간성은 온전히 당사자 문제다. 그것까지 정부에 바랄 수 없고, 설령 정부가 한다 하더라도 잘할 수 없다. 사실 재취업하면 인간성, 심리 등  문제가 자동 해결된다. 서점, 인터넷 북스토어에서 “실직”으로 검색하면 노동법, 인사 문제, 경제정책연구보고서 이런 종류의 책뿐이다. 실직을 마주하는 개인의 생각, 의식, 불안감을 다룬 책은 보기 어렵다. 실직 자체가 당사자에게는 꺼내기 부끄러운 일이다. 그동안 실직에 대응하는 개인의 소회는 부끄러워 스스로 꺼내지 못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러나 한창 일할 20~30대만 실직자가 53만 명이라는데 실직에 대응하고, 참고하려는데 도움될 만한 뭔가를 원하는 수요가 있지 않을까. 나 역시 실직당하지 않았다면 이런 책을 쓸, 볼 고민도 하지 않을 것인데.


아픈 기억을 밖으로 꺼내기 어렵다. 혼자 묵혀가며 감당하려 한다. 그 사이 인간관계도 소원해진다. 늘 지내던 친구와 늘상 해오던 짓을 해도 연극 지시문 처럼 괄호안에 (실직 중)이 늘 붙는다. 상대는 지시하지 않지만 당사자는 지시문의 괄호가 닫힌 것 처럼 위축된다. 결국 혼자 문제로 전락하는 게 자연스럽다. 그런데 앞서 실직자 빈도를 보면 ‘실직’이라는 현상은 혼자 숨길 수 없는 만연한 나의 직간접적인 일이다. 

사업도 마찬가지다. 성공한 사업을 말하는 책은 다양하다. 반면 사업을 말아먹은 이야기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건범의 <파산>은 무엇보다 자신의 사업 실패 과정을 기록했다. 회사가 망해서 근로자 체당금 지급 서류까지 처리해준 고통스러운 기억을 세밀하게 말한다. 그의 사업은 몰라도 아픈 기억을 밖으로 꺼내 기록한 것은 높이 평가한다. 사업가에게 실패는 파산이라면, 근로자에게 실패는 실직이다. 행복한 사람을 제외하면 모두들 사색을 한다고, 행복한 여건에선 사색은 할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실직은 실패로 자아가 무너지기도 하고, 오감으로 전해오는 고통이다. <실직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근사한 제목이지만 사색이라고 낭만스럽게 말하기도 어렵다. 실직할 수 있다.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기보다 일어날 수 있는 일, 이번에 실직을 만났구나 하면 그 속에서 사색이 가능해진다. 고통과 공포가 사색으로 변할 수 있다. 두 번째 실직에서는 첫 번째 실직 기간에 다짐했던 ‘왜 나에게’라는 태도보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할 것인가 대응하려 했다. 그러나 관성, 본능적으로 ‘왜, 왜 나에게’ 하게 된다. 더욱이 연이은 실직이라 “또, 하필 왜 나에게”, “왜 나에게 이런 일이 다시” 하며 이 기간을 ‘어떻게 보내나’와 ‘왜’의 싸움이 돼버린다. 그렇게 실직이란 본능적인 ‘왜’를 거슬러야 하는 어려운 대응이다.   

   

실직으로부터의 사색은 90일간 저녁마다 기록해놓은 기억에 의해 이뤄졌다. 과중한 충격 속에서 무언가, 한정된 기간 동안 특정한 조건의 일상, 그걸 기록해놓으려는 내 노력은 우습게도 쌓인 기록으로부터, 생각이 변해가는 것으로 어떤 통찰을 얻기 위한 거창한 소망이기도 하다. 처음 기록을 뿌리 삼지만 흔적을 모아 다듬고, 편집한다. 기억은 단독적인 기능이 아니라 여러 다른 기능의 조합, 특히 오늘 나로 인해 재구성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과감하게 그때 힘든 기억을 다시 살피고, 오늘로 재구성했다. 혹, 제목을 보고 ‘실업 상태’, ‘실직자’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 잠언을 기대한다면 거기엔 부응하지 못할 것이다. 한편 모두에게 통하는 일반적인 이론은 개별적인 상황에 별다른 의미가 없기도 하다. 그때그때 상황, 조건에 따라 맞출 필요가 있다. 따라서 ‘실직’은 보편적 공식보다 개인 사정에 따라 각양각색으로 그 기간을 보내는 방법이다. 실직은 보편적이면서 개별적이라 모두에게 새롭다. 이 책에 담긴 사례와 사색을 보며 다른 실직자가 공통해 공감하는 부분이 있어, 이게 나만의 문제가 아니고 남들도 겪는 일이구나 한다면, 보편의 문제로 승화해 실직자가 상태를 공감하고, 위로하며 한시적으로 연대감을 기진 다면,      

무엇보다 당신의 긴 하루를 단 10분이라도 견디는 데 도움된다면 소기의 성과를 이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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