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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Jun 23. 2020

사색79. 너는 그러냐

5월 10일(토)

결혼식에 간다. 잘 알고 지내는 이는 아닌데 초청장을 받은 터라 가본다. 예식장은 경기도 이천, 결혼식장 대절 버스가 오는 곳으로 가는 길, 예전에 잠깐 같이 일했던 직원을 지하철에서 만난다. 요즘 안 바쁘시냐, 뭐하시냐 인사를 건네 온다. 왜 안부 인사를 ‘요즘 뭐해?’라는 질문으로 할까. ‘오늘 날씨 좋죠?’, ‘오늘은 맑다는 기상청 예보가 잘 맞겠죠?’로 하면 안 될까. ‘최근에 사직했다’고 상태를 말한다. 억울하게 해고당했다고 말하는 건, 지하철에서 잠시 스치는 사람인데 딱히 그런 소식까지 공유해서 공감을 유도할 필요 있나. 그리고 사실 서로 사정에 크게 관심 없잖나. 쉰다는 말에 “얼굴 좋아 보여요!” 하더라. ‘얼굴 좋아 보인다’라는 상투적인 표현, 정작 좋아 보이는 얼굴을 가지고 있는 놀고 있는 사람 속은 좋은지, 나쁜지 알 바 없는 본인 판단이다. 우리 어머니는 좋아 보인다는 이 얼굴을 보면서 “얼굴이 많이 상했구나” 하며 속 상해할 텐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서로 관심 없게 나누다 서로 내릴 역에 맞춰 헤어진다.       


대절 버스에서 모처럼 만나는 김진우 이슬비 부부, 지난해 결혼한 부부에게 어떡하면 결혼할 수 있는가, 남자들은 어떤 여자를 좋아하는가, 슬비씨는 진우라는 남성을 배우자로 선택한 이유가 무엇인가 등, 결혼식 가는 길 어떻게 결혼할 수 있냐고 서로 생각을 나눈다. 진우는, 본인의 결혼은 하나님이 자연스럽게 만든 것 같다고 신앙고백을 한다. 젠장,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을 선택하는 가장 인간사에 신적인 개입이 자연스럽다는 예상하지 못한 신앙고백을 듣는다. 슬비가 우리에게 남자들은 어떤 여자를 좋아하냐는 질문을 하니, 결국 남자는 얼굴, 외모 본다고 말하니, 슬비씨는 남성들의 그런 편협함에 불만스러워한다. 사실 슬비씨 본인이 예쁘니까 남자들이 다들 잘해주는 대응에 익숙해서 그렇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사정을 모르는 불만이다. 모든 여성은 그 자체로 의미 있으나, 심지어 어떤 의미를 가질 필요도 없으나, 대부분의 남자는 그 의미를 평가하는데 외모로 종속해버리는 오류를 범한다. 이 오류를 주되게 작동시켜 배우자를 찾으니 서로의 진의를 파악하는데 많은 낭비가 발생한다. 문제는 이 낭비가 효율적이지 못한 것인 줄 알면서도 그 편협함은 쉽게 놓이지 않는다.       


결혼식장에 이천 시온성교회에 도착했다. 경기도 이천에 있는 시온성교회는 1934년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졌다. 교회가 일제 강점기부터 지금까지 이어왔다고 자랑할 정도면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신사 참배를 거부했다는 당당함에서 비롯할 것, 교회 연혁을 살펴보니 신사 참배 거부로 해방 때까지 문을 닫아야 했다. 신사 참배라니 예전에 읽었던 소설 엔도 슈사쿠 <침묵>이 떠오른다. 16세기 포르투갈인 예수회 선교사 세바스티안 로드리고가 일본에 선교하러 간 자기 스승이 천주교를 배신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고야에 들어가 숨어 선교활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스승과 같이 배교하기까지의 고뇌와 고통을 그린 소설이다. 당시 일본 지배층은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상인들의 교역을 통해 천주교가 전파되자 천주교를 일본의 정신을 병들게 하는 위험요소로 간주해 천주교 신자를 극심하게 탄압했다. 세바스티안 신부는 자신의 선교 활동으로 현지 원주민 천주교 신자가 받는 고문과 핍박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스승과 같이 배교하고 마는, 구체적으로 예수 성화상을 땅바닥에 놓고 사람들 앞에서 정기적으로 밟게 하는 후미에(踏み絵)라는 행위에 적극 참여한다.       

"신부는 발을 올렸다. (중략) 자기는 지금 자기 생애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다고 여겨온 것, 가장 성스럽다고 여겨온 것, 인간의 가장 높은 이상과 꿈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밟는 것이었다. 이 발의 아픔. 이때 밟아도 좋다고 목판 속의 그분은 신부를 향해 말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들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나, 너희들의 아픔을 나누어 갖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졌다.      
이렇게 해서 신부가 성화에 발을 올려놓았을 때, 아침이 왔다. 닭이 먼 곳에서 울었다." 
<침묵(김윤성 옮김, 바오로딸)>     


순교와 배교의 차이는 무엇일까. 신사 참배를, 후미에를 거부하고 신앙을, 믿는 바를 지켜 목이 베어야만 순교일까. 신념을 유지하는 것은 신적 개입으로 인한 것인가 나의 고집인가. 내가 거부하는 신사 참배 때문에, 내 신앙 때문에, 내 고집으로 내 이웃, 내 가족이 고문을 당하거나, 목이 베인다면, 그래서 결국 신사에 참배를 했다면 배교인가. 개인의 신념으로 인해 타인에게 피해가 간다는 구조 속에서 신념을 지키는 것은 옮은 것인가? 신은 믿는 이에게 그런 억울한 구조까지 고려하시나? 소설은 ‘침묵’이라는 제목을 하고 있지만 본문에서는 신의 음성으로 ‘밟아도 좋다’고 한다. 남들은 몰라도 오직 신은 중심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밟아도 좋은가?, 그렇게 밟아도 괜찮은 건가?      


인터뷰나, 책을 통해, 친일 하신 분들 말씀을 잘 들어보면 오랜 강점기로 결국 해방될 줄은 몰랐다, 그게 애국하는 길인 줄 알았다, 내 가족 먹이는 데는 조선왕조보다 일본 세력에 동조하는 게 당장 낫더라고 하던데, 사실 그런 이기적인 행태가 자연스럽지 않나. 본인은 물론이고, 가족, 자자손손 피해가 막심한 독립운동에 투철했던 인물들의 신념이 더 이해하기 어렵지 않나. 그 전적인 희생에 따른 가정, 주변의 피해를 어떻게 고려하지 않을 수 있을까. 독립운동했다고 하시는 분들의 비현실성, 비합리성, 비지속성이 심지어 호기롭게도 느껴진다.      


독재 시절 민주화 투쟁에 가담한 운동권 세력을 진압하고, 조사하고, 추적하고, 법정에 세워 처벌받게 하던 공권력, 그 공권력으로 밥벌이를 하던 사람들도 혹시, 자기들이 하는 일이 민주화 운동권이 말하는 애국만큼 애국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그게 나라를 위한 일이라고 단단히 마음먹고 일하지 않았을까.      


결혼식장 교회 탑에 종이 여러 개 달려있다. 이게 울린다면 뎅 딩 동 뎅 동 딩, 여러 종 울림이 겹쳐 조화로운 소리를 낼 것 같다.      


결혼식은 노멀 하게 진행되고, 식 말미 신부 동생이 직접 만든 곡으로 축가를 한다. 직접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는데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진 과정을 알콩달콩한 가사로 풀어놓다가 끝에는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을 이어 하객 모두 함께 합창을 유도한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 훌륭한 축가, 찬양 가사에 신랑 신부는 물론 앉아있는 내가 다 눈물이 나더라. 순간 좀 전에 신사 참배, 순교에 대해 생각했는데, 이제껏 내가 산 게 다 주님의 은혜라면 앞으로 살 것도 주님에 종속될 테니 순교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게 독립운동으로 확대해서 나라가 나를 먹여줬다면 위험에 빠진 나라를 위해 죽을 수 있지 않나. 죽어도 좋은가?, 그렇게 죽어도 괜찮은 건가?      


집에 도착해서 뉴스를 보는데, 예전 내가 첫 직장으로 일하던 회사의 N사장이, 그 회사의 회장으로 됐단다. 같이 일할 땐, 휴대폰 문자 하나 보낼 때도 목적어에 맞는 조사와 문장 마침표까지 제대로 안 썼다고 혼날 정도로 까다로워 괴로웠지만, 생각해보면 그때 가장 많이 배운 듯하다. 이제야 그렇다지만, 같이 있을 때는 너무 괴로웠다. 문장의 목적어 따지시는 분이 회사 의사결정의 최고 책임자가 된다니, 잘하실 수 있을까? 자신의 신념이 고객 만족까지 이뤄질까? 기대와 회의가 동시에 일어난다. 아주 명쾌하고 분명한 미시적인 목적으로 일하는, 뭐랄까 신문기자 같이 일하시던 분이라, 거시적인 차원으로 접근해야 할 회장급이 될지는 몰랐는데, 그 성취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룹 전체 조직의 의사결정의 책임자가 된다니, 촌에서 자라 말단 사원으로 입사해서 그룹의 장이 되다니, 개인 트랙으로만 본다면 정말 대단하다. 출세했다고 표현할 수 있다. 개천에 용이 났다. 그런데 개천에 용 한 마리 나올 때, 미꾸라지는 얼마나 많이 죽고, 죽여야 할까. 죽어도 좋은가? 죽여도 괜찮은 건가?     


저녁에 김성한이랑 식사한다. 근처 대학교 안에 있는 프랜차이즈 식당으로 간다. 한적해서 식사하기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7시 45분에 들어가니, 종업원이 8시에 가게 문 닫는다고 주문을 받지 않겠단다. 아니 토요일에 이렇게 일찍 마감하는 장사가 있냐, 학교 안이라고 여유롭게 장사하냐며 다그쳤다. 결국 그 식당에서 나온다. 성한은 흥분한 나에게 그런 거 종업원에게 따질 필요 없다고, 영업시간은 사장이 결정하는 거고 종업원은 지시에 따르는 것일 뿐이고, 여유롭게 장사하고도 월급 받으면 종업원은 좋은 것이니 종업원에게 그리 따지면 서로 감정만 상한단다. 사장에게 따질 게 있고, 종업원에게 따질 건 따로 있다는 지적이다. 이에 나는 혹시 영업 위임을 받은 근로자가 자기는 매출에 크게 관심 없고 자기 월급만 받으면 되니 마감 시간 즈음 오는 사람에게 장사를 하지 않는다고 하면, 오늘 쓸 재료(재고)가 떨어진 것도 아닌데 손님을 받아야 할 주인 정신이 필요하지 않냐 따지니, 성한은 나에게 "너는 그러냐?" 하고 되물으며 자신의 견해가 이 논쟁의 정답이라는 사실을 각인시킨다. 직장 생활할 때 나는 회사에 주인정신을 가졌나, 월급 정도만 하자고 했을가. 그런데 남의 가게에서 주인 정신 따지는 게 더 웃기다. 나는, 너는 그런가. 따져도 좋은가? 따져도 괜찮은 건가?       


마침 오늘 결혼식에 다녀왔으니 ‘결혼’에 대해 이야길 나눈다. 이제 어린 나이도 아니고, 서른 중반인 우리가 원하는 아내감은 사랑이라는 감정보다 함께 의지할 수 있는 의리 같은 게 아닐까. 그러나 여자는 사랑을 원하는데, 우리는 의리를 강요하니 니즈가 달라 관계를 형성할 수 없을 것 같다. 의리도 사랑으로부터 시작해 의리로 승화돼야 할 터, 처음부터 의리를 찾는 건 틀린 듯하다. 집 앞 공원 벤치에서 음료수를 마시는데, 실직으로 지긋지긋한 내 일상의 장소에서 친구랑 여유롭게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으니 이 공간이 예전과는 달라진 듯하다. 누구와 무얼 했느냐가 그 장소에 대한 느낌을 규정하는 데 크게 영향을 주나보다.   

   

밤에는 운동장에서 달리기를 한다. 20분 동안 400미터 트랙 8바퀴를 돈다. 흐르는 땀이 상쾌하다. 실직했는데 상쾌해도 좋은가? 상쾌해도 괜찮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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