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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사창우 Dec 11. 2020

사색81. 또, 실업급여받으러

5월 12일(월)

고용보험 실업급여 수급자격 신청 교육을 받으러 고용노동부 서울남부고용센터로 간다. 뭘 교육하겠다는 건지, 실업자의 유일한 목적 재취업인데, 취업 교육을 해준다는 건지. 교육을 이수하면 돈 준다고 하니 거길 가지, 젊은 나이에 실업자들 모인 곳으로 들어가는 게 서글프다. 아니, 나이 불문하고 누군들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을까. 대기자들 속에서 난 잠깐 실직한 것뿐이고 여기는 돈 준다고 해서 받으러 온 것뿐이고, 저축도 좀 있는데 이 돈은 준다니 받을 뿐이고, 그곳에선 아무도 남들 신경 쓰지 않는데 뿐뿐한 표정 관리에 힘을 쏟다가, 곧 표정을 유지할 힘도 없어지고, 내가 여기서 뭐 하는 건지. 누가 망치로 계속 머릴 때리는 듯하다. 


200명이 넘는 사람들로 강당이 가득 찬다. 교육이란 게 재취업, 구직에 대한 게 아니라 어떡하면 실업급여를 받을 수 있나, 부정 수급하지 않나 하는 돈 타는 요령 안내이다. 통계적으로 실업급여 수급자 대부분이 90일 내에 재취업한단다. 실업급여 관리자 입장에서는 실직자가 양질의 일자리를 찾아 재취업하는 것보다 취업을 다시 해서 수급을 끝내는 데 신경을 쓰는 듯하다. 취업수첩, 실업급여 필요한 내용, 실업 급여 수급자에 대한 정보를 기록한 수첩을 준다. 전직 월급으로 이런저런 계산을 해서 내 실업급여가 일일 5만 원, 급여 최고 상한 금액(당시 기준)이란다. 하루 5만 원, 여하튼 오늘 교육을 마치면, 회사에서 면직당한 날부터 오늘까지 실업급여 약 60만 원을 통장에 넣어 준단다. 참 좋은 나라다. 그동안 한 것도 없는데 60만 원이나 준다. 아니, 그동안 잘 견뎌냈으니 주는 돈이다. 실직을 잘 버텨보라는 격려 같다. 그런데 이게 공돈은 아니다. 내 월급에서 꼬박꼬박 실업 보험료를 냈으니 수급액, 보험금이 보험료에 비해 꽤 많긴 하지만. 보험료에 대한 보험금을 타는 것이다. 패전 보상금 같은 돈으로 보지 말고, 긍정적인 태도로 이 돈을 보려 하지만, 젊은 나이에 억울하게 해고당해 실업급여받는 건 여전히 울적하다. 옆 자리 아저씨가 펼쳐놓은 취업수첩에 전직 월급을 훔쳐보니 150만 원으로 나와 있다. 직관적으로 실업급여 수급자 대부분이 월소득 100만 원에서 200만 원 사이에 분포됐을 듯하다. 해당 월급 구간 근로자의 실업이 잦을 듯, 비교적 저소득인데도 실직도 잦을 듯. 취업수첩을 꼭 쥐고 있는 아저씨의 거친 손을 보니 고용 현장의 고단함이 전해진다.       


실업급여 수급자는 어떤 직종이 많을까? 건설 경기가 좋지 못하니 건설 관련 단순 노무 종사자?, 건설 기계 운전원? 병의원에서 간호사, 간호조무사 이직률이 꽤 높다고 하던데, 심지어 고위 임직원 및 관리자도 있을까. 여기 모인 우리들은 다들 뭐하던 사람들이었을까. 앞으로 다시 뭘 하게 될까.      


전국에 고용보험 수급 현황은 어떻게 될까. 오늘 여기서 200명이 넘는 사람들을 봤는데 이런 센터가 전국에 수십 개, 모이는 사람은 수십만 명 될 텐데, 보험료로 보험금을 버틸 수 있나. 결국 의료보험 같이 나라 돈이 쓰이지 않을까. 고용보험 타는 사람들이 증가하는 원인을 여러 가지로 들 수 있을 텐데, 실직이 그만큼 발생하는 것으로 본다면 경기 침체로 실직 빈도가 높아질수록 고용보험 수급이 점점 늘어날 텐데. 오늘 모인 사람들을 살펴보니 30, 40대가 가장 많아 보인다. 30, 40대가 취직도, 실직도 빈번한가 보다. 만약에 60대 연령의 수급이 증가한다면, 해당 연령은 은퇴해야 하는데 새로운 직업을 찾으려 하는 수요가 있다는 게, 우리나라 경제 침체를 말해주는 지표 중 하나가 노년의 재취업률일 수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설렁탕 가게로 들어간다. 아직 이르지만 밖으로 나온 김에 점심 식사를 해결하자. 메뉴판에 있는 설렁탕이 만원이다. 만원이라는 물가에 놀라고, 실직한 사람이 설렁탕 한 그릇 주세요 덜컥 주문하는데 놀란다. 보험금 들어올 테니 만용을 부리는 건가. 직장 다닐 땐 식당 메뉴 볼 때 어떤 음식을 먹을까 요리 종류를 골랐는데, 실직 후에는 뭐가 싼 지 가격만 보인다. 점심시간 전이라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도 이른 식사를 미리 하고 있다. 이국적인 엑센트가 들리는 걸 보니 멀리서 온 사람들이다. 요즘은 멀리서 온 사람들이 싸게 일해서 우리나라 시설 설비 산업, 서비스 현장이 돌아간단다. 싸게 일해서 소매가격이 낮아진다. 그렇다면 이들에게 감사해야 하지 않나. 그런데 그분들께 주는 돈은 감사함보다 훨씬 적다. 적은 돈이라도 여기서 벌고 가겠다는 그들의 선택, 그런 선택은 선택일까, 강제일까.     


예전에 부산으로 가는 길 고속철도 안에서 객차 내 선택적 검표를 하는 승무원이 내 앞 마주한 동남아시아인에게만 검표를 요구했다. 와이셔츠 가슴 호주머니에서 표를 꺼내 주며 만감이 스쳐 지나가던 그의 표정을 보고 말았다. 이 무슨 말콤 엑스, 마틴 루터 킹 자서전 같은 일이 내 눈앞에서 펼쳐지나. 승무원의 선택은 틀렸고, 표를 내밀며 다친 마음에는 아무런 보상이 없다. 편견에 따른 실책, 승무원은 본인이 인지하지도 못했겠지만 자신의 선택에 대해 사과의 눈빛만이라도 그 다친 마음을 어느 정도는 보상할 수 있었을 텐데.      


설렁탕 한 숟갈 입에 넣는다. 만 원짜리 설렁탕인데, 오천 원짜리와 별 차이를 못 느끼겠다. 고용센터 앞이라 실업급여 탄 사람들의 호기로움을 노리는 건지, 멀리 타국까지 와서 일하시는 분들의 노고를 고려한 가격인지. 입에 넣을수록 부담스럽기만 하다.      


공돈이 생겼다지만 여전히 우울하다. 우울함을 어떻게든 없애려 침대에 누웠다. 노트북을 배에 올려놓고 영화 <관상(2013)>을 본다. 인간이 자신의 미래를 알고 싶거나, 자신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위험 요소를 제거하려는 행태는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여전한가 보다. 옛날에는 필요한 정보가 뭔지 몰랐으니, 정보라는 게 거의 없었으니 관상 같은 걸 정보 랍시고, 심지어 어떤 결정에 큰 요인이었을 터. 사람 얼굴 보고 어찌어찌하게 될 것이다 하고 자주 점을 치다가 한두 번 맞으면 용하다 소리 듣겠지 않을까. 수양대군 역으로 나온 배우 이정재, 첫 등장은 과히 압권이다. 지금까지 한국영화에서 등장한 인물 장면 중 손꼽을 듯하다. 수양 입장에서는 왕이 되고 싶다는 사욕보다 조선을 위한 올바른 제도를 도입해야겠다는 의도가 더 컸다면 역모의 이유가 나름 타당했을 텐데, 이후 역사적 사실을 봐도 개인의 왕위 찬탈이 역모의 가장 큰 이유 아니었나 싶다. 그의 역모는 본인도 이 씨 왕가의 핏줄인데 12살짜리 어린놈이 하는 왕, 나라고 왕 왜 못해?! 하는 콤플렉스 수준이었을까. 그렇게 왕이 되고 싶을까. 요즘 승진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봐도 매 한 가지 아닐까. 회사원, 고위 공무원, 판검사, 차장, 부장, 상무, 전무 등 다른 일엔 덤덤하다가, 옆 동료가 승진하거나, 요직으로 발령 나면 배 아파하고, 본인도 줄 서서 요직으로 발령해 달라고 한다는데. 승진 인사의 핵심은 옆에 어중간한 놈, 무능한 놈이 승진하는 데 대한 못마땅함이지 않을까 싶다.      


영화가 다 끝나 오후 다 지나 해가져도, J회사에서 사장 면접 오라는 전화는 오지 않았다. 오늘 월요일인데, 사장 일정 잡기가 그렇게 어려운가. 혹시 채용이 취소됐나? 부정적인 예상이 맞아가는 건가. 불길한 생각이 온몸을 조여 온다. 아무런 의욕이 없어진다. 여기까지 왔는데 또 아닌 건가, 다 된 게 아닌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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