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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기자 Jan 20. 2020

일본여행의 기억을 지어다가 몇년을 행복하게 우려먹었다

2013년 가을, 비내리고 습하던 교토의 기억


아마 2013년 가을이었던 것 같은데, 그해 9월 일본 간사이 지방은 무지하게 습하고 바람이 많이 불었다. 원래도 태풍으로 악명높은 일본의 늦여름이지만, 그해엔 세 개의 태풍이 늦여름까지 연이어 왔다. 그 덕에 나의 늦은 여름휴가는 너무 춥고, 끈적하고, 스산했다. 그래도 그때를 떠올리면 마냥 아련하고 흐뭇하다. 혼자서 떠난 첫 해외여행.


그즈음 나는 회사에서 어느 팀에 가든 늘 막내에 신입 신세라서 유독 회사생활이 싫고 고달팠다. 지금 생각하니 회사생활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연차가 쌓여도 늘 어느 한구석인가는 싫고 고달프고 사람을 괜히 억울하게 만든다. 딱히 누구에게 상처받았는지도 모르는 채로 혼자 좀 우울에 잠겨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피치항공을 타고 오사카로 향했다. 


비 내리던 교토.ⓒ커피비누


교토에서는 매일매일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었다. 가디건을 입지도 벗지도 못하게 하는 날씨. 벗자니 춥고, 입고 다니자니 비바람에 축축하게 젖은 천이 주기적으로 피부에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그래도 추운 건 너무 싫으니까, 잘 빨아 말려둔 가디건을 아침마다 꼭 챙겨서 나왔다. 

교토에서의 셋째날, 어김없이 또 젖은 가디건을 입고서 바닥난 체력을 채찍질해 교토 시내에 있는 ‘니시혼간지’로 향했다. 일본 온 분위기를 한껏 내보겠다는 마음에 스마프 노래와 이누야샤 주제가 같은 것들을 들으면서.

      

니시혼간지는 크고, 점잖고, 반들반들 빛바랜 나무기둥과 바닥이 인상적인 절이었다. 여행책자에는 별 다섯 개 강추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라고 강조된 곳. 누군가는 볼 것이 없다고 절대 가지 말라고 하고, 누군가는 세계문화유산이니까 꼭 가라고 하는 그 곳에서 간만에 젖어버린 신발과 가디건을 떼어냈다. 비에 젖어 축축한 신발을 벗어서 신발보관장소에 두고, 맨발로 나무 마룻바닥에 올라섰다.

 

얼마남지 않은 핸드폰 배터리를 노래듣기에 사용하기로 결정하고,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때 잠시 일본문화에 심취했을 때 듣던 노래들 사이로 삐걱거리는 나무바닥 소리가 들렸다. 걷는 소리가 너무 시끄러운 것만 같아 발바닥을 조심스레 뗐다 붙였다 하면서 30분 정도 느릿느릿 걸었다. 줄어들어가는 스마트폰 배터리를 더이상 외면할 수 없을 때에서야 걷기를 멈췄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해 혼자여행의 추억을 남기고, 다시 축축한 남색 뉴발란스를 신었다. 다시 체력을 채찍질해 게스트하우스까지 걸어서 돌아온 후, 신발드라이기에 신발을 넣고, ‘이렇게 쉴 때가 아닌데’라는 조바심을 내면서 씻고 낮잠을 세 시간이나 잤다. 깨보니 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해서 좀 서운했던 날.


떠올리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편안해지는 니시혼간지의 마룻바닥.ⓒ커피비누


오늘 집근처에서 일본식 수타우동을 먹었다. 화려한 맛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흡족한 맛이었다. 어째선지 비오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같이 우동을 먹던 사람에게 이야기해주었다. 가끔 일상 속에서 맛있는 것을 먹거나 생각지 못한 순간에 소소하게 흐뭇한 마음이 들면 그때의 일본여행이 떠오른다. 글로 정리하면 무엇이 그 여행을 참 흐뭇한 기억으로 남게 만들었는지 누군가에게 설명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다 쓰고 나서도 딱 잘라 설명하긴 어렵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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