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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 기자 Jan 28. 2019

내 비위를 맞춰줄 자는 나입니다

지나친 자기성찰을 거듭하면 시무룩해진다

나는 책임감없는 어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직장생활을 몇년 하고 나서 나는 일을 미루는 사람을 과도하게 싫어한다는 것을 알게 됐다. 선배 혹은 상사라는 점을 앞세워서 누구나 하기 싫어하는 잡일들을 후배에게 몰아준다거나, 유리한 근무일정을 선점하는 행동들이 싫었다. 나 역시 때론 그런 선배이자 상사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지 않았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서, 언젠가부터 매일 일과가 끝나고 집에 돌아올 때 자기성찰을 하는 시간을 가졌다. 버스에서 내려서 육교를 지나 언덕길을 올라오는 동안 하루의 기억을 돌려보며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지 되짚어보고, 다음에 그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풀어나가야할지 '정답'을 찾아보는 데 골몰했다. 


허나 무엇이든 지나치면 좋지 않은 법이다. 자기성찰이 도를 넘어 자기질책이 되는 순간이 많았다. ‘왜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할까’ ‘이땐 좀 더 자기방어를 했어야만 해’ ‘이 일은 이렇게 처리했어야 하는데… 다음엔 어떻게 해야하지…’ 

성찰인지 질책인지 비난인지 모를 목소리들이 내 마음속에서 울려퍼졌다. 회사에서 일이나 인간관계가 잘 풀리지 않을 때면 자기질책이 더 심해졌다. 연차가 쌓이면서 누구나 으레 겪는 긴 권태가 찾아왔던 시기, 답이 없는데도 열심히 답을 찾아내며 나를 채찍질하다가 우울의 늪에 꽤 깊게 빠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아, 누구도 나에게 뭐라하지 않는데 내가 나를 비난하고 있구나.’


사람 습성이 한 번에 바뀌진 않지만, +가 아니라 -에 방향성을 둔 자기성찰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 나는 조금 달라졌다. 성찰을 가장한 질책의 목소리가 울려퍼지려 할때면 잠시 생각을 멈춘다. 만사에 좀 무신경해져보려고 애쓴다. 나도 누군가에게 폐끼칠 수 있고, 완벽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가끔씩 의식적으로 곱씹어준다. 나처럼 아무도 모르는 공간에서 시도 때도 없이 예민해지는 인간에게는 매일 무던해지려고 연습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20대에 이런 걸 좀 더 알았더라면 매일 감정의 격랑을 겪지 않아도 됐을텐데…


최근에 ‘자기 인생의 철학자들’이라는 인터뷰책에 실린 디자이너 '노라노'의 인터뷰를 읽고, 스스로를 좀 더 북돋아줄 수 있게 됐다. 올해로 92세가 된 현역 디자이너 노라노는 굴곡진 현대사를 온 몸으로 받아내며 살아왔다. 그녀는 일제강점기였던 1928년에 10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17살에 일본군 장교와 결혼했으나 2년 뒤 이혼을 하고 패션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한국전쟁 때 피난민을 간호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왔고, 전쟁 중 한국 최초의 패션쇼를 열었다. 나혜석만큼은 아니지만 당시 시대분위기로는 상당한 ‘마녀’ ‘괴인’ 취급을 받았을 법한 인생을 살았다. 


그녀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나는 평생 건달처럼 살았다”는 말의 의미를 기자가 묻자, 그녀는 이렇게 답한다.

“건달처럼 살려면 돈에 관심이 없고, 살면서 자기 비위를 맞춰야 해요. 나는 항상 나한테 물어봤어요. “노라야! 너 뭐 하고 싶니? 노라야! 너 뭐 먹고 싶니?” 남이 내 비위 안 맞춰줘도 돼요. 내가 먼저 내 비위 맞추고 나면, 남의 비위도 즐겁게 맞출 수 있어요. 그게 건달 정신이죠.”


그녀의 가르침처럼 요 며칠 마음이 복잡할 때면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답해보니, 하루를 사는 기분이 한결 낫다. '지금 뭐 먹고 싶니'와 같은 사소한 질문에서부터 '지금 ~를 만나러 가는 게 진짜 원하는 게 맞아?' '이 일은 좀 더 미루고 싶은 거면 그렇게 해볼까'와 같은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져봤다. 좀 오글거리지만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난 후에 행동에 옮기면, 내가 상황에 떠밀려서가 아니라 내가 정말 원해서 무엇인가를 한다는 생각에 기운이 난다.


글을 마무리하려는 이 순간에도 나는 습관적으로 쭈굴거리며 '이렇게 재미도 없는 긴 글을 주절주절 쓰다니 괜찮은가…'하며 회의적인 시선을 보낸다.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본다. "어떤 마음에서 글을 썼어?" 

신문기사처럼 지루한 글이 아닌 나만의 이야기를 쓰고 싶었고, 그 이야기를 쓰는 이 시간 동안 조금 마음이 좋았다. 뭐, 완벽하지 않으면 어떤가. 뭔가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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