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우 Mar 13. 2024

출국, 이렇게 힘든 거였나요

워케이션 in 포르투갈

   마지막까지 미루다 막판에 일처리를 하는 아주 고약한 습관을 가지고 있다. 덕분에 여행 3일전부터 전투모드가 시작되고 전날은 거의 날밤을 꼬박 새다시피 해서 공항으로 가곤 한다. 그런데 이번 유럽여행은 기간도 길고 수업 관련 준비할 것들도 많아 대충 준비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아예 미리부터 다짐을 했더랬다. 미루지 말고 여유있게 준비하기! 


   생전 처음 D-3주, D-2주, D-1주, D-3일로 쪼개 차근차근 여행 준비를 진행했다. 출국 전날 마지막 점검을 하니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여행 전날 이렇게 일찍 잠자리에 드는 내가 너무 낯설었다. 역시 나이를 먹으며 철이 나는구나. 이제 비행기 타고 떠날 일만 남았다는 생각을 하며 달콤한 잠을 청했다. 그 생각이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는 다음 48시간동안 화려하게 드러났다.


   다음날 아침 우리는 출국시간보다 무려 3시간 30분이나 먼저 공항에 도착했다. 여유있게 체크인을 하고 느긋하게 출국하고 싶었다. 체크인 카운터에서 수속을 밟는데 데스크 직원분이 갑자기 돌아오는 항공편을 보여달라고 하셨다. 3달 여정을 계획중이라 어느 도시에서 아웃을 할지 아직 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오는 티켓 구입은 생각도 안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티켓이 없으면 아예 출국이 안된다는 거다. 불법체류할 의사가 다분하다는 이유였다.


   여행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왜 티켓을 안사셨나요? 정확히 얼마나 머무르실건가요? 직원분은 의심 어린 눈으로 질문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결국 우리를 돌려보냈다. 티켓 사서 오라고 하시며. 갑자기 줄에서 밀려나온 우리는 패닉 그 자체였다. 막판까지 미루는 이놈의 성격탓에 아직 돌아올 여정을 정하지 않았는데 그게 이런 화(?)를 자초할줄이야.


   미루는 성격은 내 지독한 결정장애 때문이다. 치약 하나를 선택할 때도 오만가지 옵션을 고려해 이리 저리 저울질을 한다. 그런데 마지막 여행 국가라니. 더구나 마지막 국가에서는 수업도 쉬고 일주일 자유여행을 할 계획인데 그 큰 선물을 어떻게 함부로 결정한단 말인가. 그래서 여러 나라들을 재고 또 재고 있었는데 이런, 자칫하다간 출국조차 못할 판이다. 


   몇 날 며칠 고민해도 모호하던 선택지들이 순간 머리에서 촤르르 정리가 되었다. 런던에서 뮤지컬도 보고 싶었고 뉴욕에서 베이글도 먹고 싶었고 캐나다에서 나이아가라 폭포도 보고 싶었던 마음들이 싹 정리가 되고 프랑스 남부의 평화로운 자연만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 자리에서 바로 프랑스 아웃 티켓을 구매했다. 


   선택은 5분이면 충분했다. 마음이 정말 시원했다. 고민이 많다고, 생각이 많다고 좋은 결정을 내리는게 아니라는 말이 실감났다. 괜한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하지 말고 나의 직관을 믿어 주기. 확신이 선다면 바로 선택 버튼을 누르기. 그래도 별탈 없더라. 아니, 훨씬 더 시원하더라. 여행의 시작이 나에게 알려준 큰 선물이었다. 


   자, 이야기가 이렇게 훈훈하게 마무리되면 좋으련만… 정신 차리기가 무섭게 검색대에서 캔김치며 고추장, 된장, 비빔면 소스들을 고스란히 다 뺏겼다. 허탈한 마음 그지 없었지만 어쩌랴. 짐으로 미리 부친 불닭볶으면 소스에 위안을 삼으며 비행기에 올랐다. 


곧 닫칠 재난을 모르고 영화를 즐기던 시간... 

   비행기가 이륙하고 한시간쯤 지났을까 갑자기 기내방송에서 의사를 찾기 시작했다. 응급환자가 발생한 모양이었다. 순간 쎄한 느낌이 스쳤다.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방송한 승무원 목소리가 그다지 긴장한 것 같지 않고…기내에 별 소란스러운 느낌도 없고…뭐, 별일 있겠어? 그런데 한시간쯤 후, 그 별일이 벌어졌다. 기장님이 직접 마이크를 잡으시고 방송을 시작하셨다. 응급환자 발생으로 비행기가 회항을 하겠다. 순간 귀를 의심했다. 회항이라고? 영화속에서나 벌어지던 비행기를 돌리는 것? 나를 포함한 모든 승객들이 술렁술렁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그리고 우리는 베이징 항공에 불시착했다. 


   다행히 환자분의 상태는 그렇게 위중하지 않았다. 중국 의료진들이 환자분을 데리고 가고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궁금했다. 기장님의 방송이 다시 시작되었다. 1시간 주유 후 이륙해 목적지인 프랑크푸르트로 간다는 것이다. 회항에, 환자 수송에 이미 몇 시간을 썼으니 도착시간이 지연되는 건 기정 사실이었다. 다음 연결편을 타고 포르투로 넘어가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하나 난감했다. 더구나 원래 13시간 비행 예정이었는데 더 오래 비행기 안에 있어야 한다니 눈앞이 캄캄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우리는 비행기 안에 20시간이 넘게 있었다. 통로 안쪽 좌석에 갇혀 맘껏 나가지도 못하고 꼬박 있으니 없던 폐쇄공포증도 생길 판이었다. 승무원들의 업무시간 초과로 기내식 서비스도 생략되었다. 갑갑하고 배고프고 집생각이 절로 났다. 시작이 이러니 앞으로 보낼 3개월이 와락 겁나기 시작했다. 괜히 나왔나, 앞으로 더 한일도 많을텐데 집 떠나서 고생만 하려나. 별 생각이 다 들었다.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하니 시각은 밤 11시가 넘었다. 포르투행 비행기는 이미 떠난 뒤였다. 공항 노숙을 각오하고 다음 비행기편 티켓을 끊으러 프론트로 갔다. 몰랐다. 이런 경우에는 항공사 측에서 호텔을 제공해준다는 것을. 프론트에서 받아든 호텔 이름을 보니 무려 5성급 유명 호텔! 무료 저녁과 조식 부페티켓까지 받고 객실에 짐을 풀었다. 


  

뜨거운 물에 샤워를 하고 까실까실 기분좋은 호텔 담요에 쏙 들어가 누우니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원래대로라면 포르투에 밤 11시쯤 도착이었는데 지연 덕분에 호텔에서 자고 다음날 낮에 도착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행운이었다. 



   온갖 옵션 다 따지는 선택장애, 플랜 B뿐만 아니라 플랜 C,D,E,F,,,수시로 알파벳 공부하는 나에게 지난 48시간은 확실한 특효약이 되었다. 인생은 통제할 수도, 하려고 해서도 안된다는 메세지가 마음에 콕 박혔다. 지나친 계획은 오히려 부질없다는 것, 우물쭈물 할 시간에 나를 믿고 발을 뗄 것, 계산대로 되지 않아도 훨씬 더 나은 미래가 펼쳐질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섣불리 낙심말고 여유 있게 상황을 기다릴 것. 그러다 보면 또 아는가? 5성급 호텔에서의 근사한 하룻밤처럼 멋진 일들이 나를 찾아올지도.     

매거진의 이전글 제주 이후 우리는 어디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