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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낙영 Jan 12. 2022

취향이 분명한 사람들 사이에서

오늘 제 취향은 부재중입니다

오늘은 묵혀뒀던 생각을 꺼내 보려 한다. 이 글은 다섯 번째 회사에 다니면서 생각했던 주제다. 두 번째 글에서 아주 짧지만, 본인의 멋과 취향을 정확히 아는 사람들에 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곳의 사람들은 정말 멋졌다. 브랜드・도시・음악・맛집 등 굵직굵직한 키워드를 아주 능숙하게 조리했다. 자연스럽게 그들을 관찰하게 되었고, 하나의 영역에서도 자신이 선호하는 포인트를 정확하게 짚어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아가 좋아하는 분야를 더 깊게 연구하고, 온전히 즐기기 위해 시간과 체력을 분배해 다른 방법을 시도하기도 했다.


이를 미각에 빗대어 보면 나에게 '맛있는 빵'이 그들의 입에서 '국내산 현미로 만든 고소한 빵'이 되었고, '오늘의 아메리카노'는 '산미가 감도는 오늘의 모닝 블랙커피'가 되었다. 내겐 손질하기조차 어려운 영역이 누군가에는 레토르트 식품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아우라를 느낌과 동시에 엄청난 결핍을 느끼게 되었다. 처음에는 '저렇게까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보름이 지날 무렵 취향을 잘 안다는 것이 곧 자기 자신을 알기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한 결과라고 생각되었다. 이러한 생각에 다다르니 그들이 몸서리치게 부러워졌고, 얼마 안 가 은은한 자괴감 냄새가 풍겼다. 그 냄새를 다른 사람들도 눈치챌까 입을 굳게 다무는 날이 많아졌다.




저는 다 좋아해요!

누군가가 나에게 취향을 물어볼 때, 위의 문구가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고 있었다. 빈틈도 내어주지 않던 시절도 있었지만, 강력한 주장일수록 감당해야 하는 반동이 매우 심했다는 기억이 나를 옥죄어 왔다. 여러 상황을 겪고 지나온 터라 정말 필요한 때가 아니고서야 잘 나서지 않게 되었고, 타인에게 결정권을 넘겨주기를 반복했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내가 좋아하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이어졌지만, 입 밖으로 생각을 내는 것은 자연히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은 아주 비겁하게도 고민에 빠진 척 시간을 끌다가 다른 의견에 '그거 좋은데요?'라며 호응할 뿐이었다. 점심 메뉴를 선택할 때도, 차 안에서 음악을 선곡할 때도. 상황만 다를 뿐 결과는 같았다. 어느 순간, 나는 무색무취의 '뭘 해도 좋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이 모습이 위험하다는 것을 직감한 때는 입사 후, 한 달이 지났을 때였다. 팀장님과 면담을 진행하며 한 달 동안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고민하는지 진지하게 털어놓았다. 모든 상황을 상세히 다루긴 어렵지만, 당시의 나는 처음 도전해보는 분야에서 내가 얼마큼 잘 소화하고 있는지와 더불어 위의 고민이 더해져 모든 상황에 소화불량인 상태였다. 그것이 상사에게 안 보일 리 만무했고, 팀장님은 난처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수습 기간이니까 자기 어필하는 방법을
조금 더 고민해보셔야 할 것 같아요.

에어컨 바람이 정말 서늘하게 느껴졌다. 수습 기간이 지만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처음과 달리, 그동안 나를 어필하지 못하면 정규직이 못 될 수도 있다는 경고 딱지가 붙게 된 것이다. 어깨가 한없이 동그랗게 말려갔다. 이렇게 된 이상 나만의 취향을 고민하지 않고서는 이 상황을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우선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보기 시작했다. 분야는 너무나 많았고, 주어진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과 그간의 기록들을 돌아보며 가장 많은 데이터가 쌓여있고, 취향을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보편화한 관심사이며, 나의 취향을 확고하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것은 '영화'였다. 장르를 고르자면 '서스펜스'와 '스릴러'를 좋아한다. 이제는 모든 장르에서 발견할 수 있지만, 압도적인 반전을 경험할 수 있어 가장 즐겨보고 있다.




사실 취향과 관련해 피드백을 받은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네 번째 회사의 팀장님도 내게 비슷한 조언을 해준 적이 있었는데, 장소는 이동하는 차 안이었다. 미팅 후 사무실로 복귀하는 차 안, 마침 그때도 한 달이 지났을 즈음이었다. "좋아하는 가수가 누구예요?"라며 적막을 깬 질문에 출근길 플레이리스트를 생각해내려 머리를 쥐어짰다. 3초 후, 파란 신호에 맞춰 액셀을 밟으며 팀장님은 이렇게 외쳤다.


땡! 시간 초과!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는 나를 흘끗 쳐다보며, 팀장님은 이런 질문에는 에너지를 쏟으면 안 된다고 조언했다. 이유인즉슨 나이가 들수록 좋아하는 것들도 분명해지기 때문에 별거 아니더라도 망설임 없는 대답이 필요하다고 했다. 일상에서 좋아하는 것을 분명히 하는 연습을 해야 일을 할 때도 좋은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는 피드백이 더해졌다. 결이 비슷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취향이 중요하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천천히 깨달았다.




여기에는 예상치 못한 반전이 있었다. 보편적이라 생각했던 나의 취향이 대부분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기다렸던 영화를 보러 갈 때, 누군가는 여행을 떠나는 길이었고, 누군가는 새로 생긴 카페에서 커피를 주문하고 있었다. 왜일까? 취향의 무게가 미묘하게 다르게 느껴졌다. 맛집보다는 함께 시간을 나누는 사람을, 어떤 가수인지보다는 그날 나의 기분을, 상품보다 브랜드와 기획력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내 취향 밖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자각하게 되었다. 취향은 개인을 표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지만, 그것이 그 사람의 모든 것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 결국 문제는 취향이 아니었다. 취향의 부재에서 문제가 시작된다고 생각했던 내 마음이 문제였다. 이렇게 직면한다는 것이 가장 어려운 일이었던 듯하다.



이 글에서 중요 포인트를 고르자면 내가 '결핍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에 있다. 회사에 다니며 동기부여가 되는 순간이 있다면, 함께하는 사람들과 '합이 잘 맞을 때'와 스스로 '결핍을 느낄 때'다. 전자는 말할 것도 없이 업무적인 측면에서 긍정적인 효과가 있지만, 후자는 어떤 마음을 갖느냐에 따라 이야기의 전개가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나에게 '결핍'이란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 될 수도 있지만, 한 끗 차이로 무동력이 될 수도 있음을 늘 인지해야겠다. 더불어 나에게도 부동의 취향이 생길 수 있도록 더 많은 취향을 찾아보고, 언제든 타인과 취향을 공유하고 경험할 수 있도록 열린 자세와 귀를 준비해둬야겠다. 그래서 오늘 내 취향은 부재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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