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담대학원 수업, '상담이론과 실제'의 과제 중 '내담자 경험 후 보고서 작성하기'가 있다. 이를 위해 대학원부설 상담센터에서 10회기 상담을 받았다. 상담자는 20대 후반으로 보이는 센터의 인턴이었다. 10회기 동안 모든 상담내용은 녹음되었고, 상담자는 지도교수에게 수퍼비전을 받는다. 초반부에는 녹음이 되고 있는 상황을 인식하고 상담 중에는 대상의 이름을 말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회기가 더해갈수록 녹음은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상담목표를 정하는 첫회기에 '형과의 관계에서 자유롭기'로 정했다. 자신의 감정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형에게 영향을 받고 싶지 않았다. 1회기부터 3회기까지 형과 얽혀 있는 이야기가 술술 나왔다. 상담자는 종종 그때의 내 감정을 물어보았다. 사실과 생각을 말하는 것에는 막힘이 없었지만 감정을 말하는 것은 어색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회기 내내 형과의 관계를 털어내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형은 자신이 선택한 방식으로 감정을 표현하며 살아왔으며 선택에 대한 책임은 형에게 있다. 나 역시 그러하다. 형도 원가족과 경험한 감정들을 흘려보내면 좋겠다. 형도 부디 자유롭길...
4회기부터는 내 안의 울고 있는 어린아이를 꺼내는 시간이었다. 어린아이가 다 울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른인 내가 그 아이를 안아주지 못했다. 엄마의 죽음이 무엇을 뜻하는지 5살 아이는 알지 못했을 뿐 아니라 어떤 감정이었는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다만, 돌아가신 엄마의 영정 사진이 놓인 거실에 커튼을 치고 수없이 절을 했을 뿐이었다.
1년이나 지났을까, 아버지의 재혼과 새어머니의 등장은 돌아가신 엄마를 향한 애도의 시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늘 눈치를 봐야 했던 새엄마와의 관계에서 아이의 감정은 억압되었다. 그때 어린아이의 감정은 '서러움'이었다.
상담자에게 그런 나의 어린 시절을 말했다. 말이 느려지고, 눈물이 베어왔다. 하지만 늘 그랬듯 소리 없이 눈물이 흘렀을 뿐이다. 상담자는 내게 돌아가신 엄마가 계시다고 생각하고 말해보라고 했다. 낯설었다. 눈을 감고 엄마를 생각했고 이야기했다.
"엄마, 잘 계시죠?, 많이 보고 싶었어요. 아프지는 않죠? 그곳은 어때요? 저도 나이가 들었죠? 큰 애는 얼마 전 제대해서 복학을 앞두고 있고, 둘째는 대학교 1학년이에요. 아내도 잘 있고요. 머지않아 엄마를 그곳에서 만나겠죠? 그때 만나면 꼭 안아드릴게요. 보고 싶어요. 사랑해요"
"이번에는 새어머니에게도 이야기해 보시지요." 상담자가 제안했다. 무슨 말을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새어머니와 지낸 시간들을 떠올렸다. 아... 좋은 게 없다. 부모님이 미국으로 이민 가시기까지 30년 가까이 함께 살았는데. 좋은 이야기를 나눈 기억도, 따뜻한 감정을 느낀 적이 생각나지 안 난다. 새어머니는 생존하기 급급했던 시간을 보내셨던 것 같았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으셨을 것 같은 새어머니...
"어머니, 어머니의 화를 제게 쏟아내셨던 그때 저는 참 많이 힘들어요...." 밉고, 화가 나고, 잘못을 따지고 싶었다. 다 용서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때의 생채기가 그대로 떠올랐다.
"마음이 어떠세요?" 상담자가 물었다.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얘기한 게 처음인 거 같아요. 낯설어요. "
상담자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 얘기해 보라고 했다.
"아이야, 내게 안기렴, 울어도 괜찮아. 마음껏 울려무나." 어른인 나는 어머니를 충분히 애도하지 못한 아이에게 말했다. 아이가 안쓰러웠다. 눈물이 또다시 흘렀다. 상담자는 내게 상담기간 동안 울고 있는 어린아이가 보였다고 했다. 상담자는 회기 중간중간 지금까지 많이 감정을 억누르고 지내신 것 같은데 자신에게 이야기하듯 가까운 사람에게 감정을 나눠보라는 숙제를 내주었다. 아내에게 사건중심이 아닌 감정중심으로 이야기하려고 해 보았다.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제부터인 것 같다.
상담 10회기가 끝났다. 이제 나는 과거에 머물러 있지 않고, 지금 여기에서 내 감정을 알아차리고, 타인에게 피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내 감정을 표현하며 살아내려고 한다. 감정을 좋다 나쁘다로 나눌 수 없다. 감정은 감정일 뿐이다. 감정에 이끌리거나 억압해서 나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상투적인 말이지만 늦은 건 없다. 지금 여기가 가장 빛나는 순간이다.
느끼자!
표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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