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릴까 포기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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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에 연연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순간에 집중하고, 쉽게 초조해하지 않고, 시원스럽게 호감을 표현하면서도 지나간 사이에 미련을 남기지 않는 산뜻함을 추구했다.
비극적이게도,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도 나는 돌이킬 수 없는 걸음을, 이미 흘러간 과거의 흔적을 자꾸자꾸 뒤돌아보는 어른으로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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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동창인 Y와는 졸업 후 꽤 오래 돈독하게 지냈다. 정작 같은 반일 때는 그렇게 가깝지 않았는데, 뮤지컬을 좋아하는 Y가 내가 살던 서울의 자취방에 자주 들르기 시작하면서 더 친해졌다.
닭강정, 하겐다즈 바닐라, 스페인 요리 따위. 지금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 음식들을 나눠 먹으며 우리는 온갖 대화를 나눴다. 며칠 전 본 연극과 몇 달 후 올라올 뮤지컬에 관해, 비합리적인 시스템과 진절머리 나는 상사에 관해, 고등학생 때 오해한 서로의 인상에 관해.
대중없이 흘러가던 화제는 어느 순간 아직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속마음으로 옮겨갔고, 나는 ‘아직 누구한테도 해본 적 없는데’라는 Y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듣기만 한 건 아니고, 이따금 추임새와 사소한 질문을 넣어가면서.
훗날 Y는 이날 ‘너를 정말 친한 친구로 자리매김하게 됐다’고 털어놨다. 비장한 분위기는 아니었다. 추억을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던 와중에 튀어나온, 가벼운 말이었다.
나는 단순히 취미도 겹치고 취향도 대충 맞아 잘 이어져 오고 있다고만 여겼는데. 뉴스를 보면 같은 맥락에 화를 내는 친구라 멀어지지 않았다고만 짐작했는데. 그 말을 들은 뒤로는 나 역시 그 순간-오렌지빛 조명이 은은하게 퍼졌던 스페인 식당에서의 대화-이 아주 중요한 분기점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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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와 나는 서로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느 부분에서 취약해지고 어느 부분에서 예리해지는지 알았다. 전부는 아니라도 대부분. 영어로 치자면 almost. 그 정도의 부사는 붙일 수 있는 사이.
Y가 ‘너만큼 나를 아는 사람은 없지’라며 너스레를 떨 때면 유치한 자부심이 들었다. 나는 너를 이만큼이나 알아. 본인은 지리멸렬하고 구질구질하다고 자조하는 속내를 들을 때면 그 믿음은 점점 더 강해졌다.
나는 미련이 많아서 사람을 잘 못 끊어내.
나도.
이미 서로 다 아는 약점을 괜히 한 번 더 털어놓던 밤. 구깃구깃 접어둬 감춰놓은, ‘진짜 별로인 마음’을 괜히 상대에게 펴 보인 시간.
Y 앞에선 그런 게 어렵지 않았다. 자연스러웠고 편했다.
3
Y와 연락이 닿지 않은 지 1년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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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로 들어갔다.
4개월 동안 메시지를 읽지 않던 Y는 돌아오면서 그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 Y는 거기. 지리적인 관점에서 Y는 한 번도 떠나지 않았지만 그 행위는 분명히 이별과 맞닿아 있었다. 떠났고, 돌아왔다. 그때 나는 화내지 않았다.
그날 화를 냈어야 했을까? 하지만 정말 화가 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싼 모든 요소에서 차단되고 싶은 마음을 아예 모르지 않았고, 돌아오리라고 믿었으니까.
Y의 선택을 존중하고 싶기도 했고, Y를 존중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도 한 번 더 말도 없이 이러면 너랑 인연 끊을 거야.
에이, 두 번은 안 그러지.
잠수 탈 거면 탄다고 티저라도 보내. 연락하기 힘들어서 안 하는 건 괜찮은데, 대충 ‘당장 말하기 힘든 일로 버거워져서 당분간 연락 안 됩니다’라고 잠수 예고편이라도 보내라고.
농담조였고 농담이었다. Y와 인연을 끊을 상상도 각오도 안 해봤다.
그래도 마지막 말만은 진심이었고, 아무리 힘들어도 그 정도 정성은 발휘해 줄 사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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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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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이해하려 했다.
그럴 수 있지. 설명하기 곤란한 사정이 있나 보지. 마음을 수습할 정신도 없나 보지. 어떤 사건은 주변과 연결될 힘마저 앗아가 버리니까. 아끼는 사람을 구렁텅이에 빠트릴까 봐 손을 내밀 엄두도 못 내고 안으로 파고들기만 하는 이들이 있으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어떤 정황도 듣지 못했지만. 그렇게 얄팍한 관계는 아니니까.
그다음엔 책임을 묻고 싶었다. 피해자인 나와 가해자인 Y를 정확히 나눠 채찍질하고 싶었다. 나의 무결함을 피력하고 Y의 잘잘못을 증명해 내 괴로움에 당위를 얻고자 했다.
너는 잘못했어. 아주 큰 잘못을 한 거야. 내게 용서를 구해야 마땅해. 적어도 5년은 이 화제가 나오면 납작 엎드려야 할 만큼 미안해해야 한다고.
하지만 나는 Y의 어깨를 잡아 흔들며 따지지도, 욕설을 섞어가며 고함을 지르지도 못했다. Y는 떠났으니까.
그다음엔 잊으려 했다. 그렇게 신신당부했는데도 예고 없이 사라졌으니, 다시 예고 없이 나타나리라 여긴 채로. 그때까지 잊고 살기로.
신경 쓰지 말자. 신경 쓰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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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경 쓰지 말자.
무언가에 빠지면 무섭도록 열정적이고, 싫어하는 것에 신랄한 독설을 내뱉고, 제 물건을 나눠주기를 아끼지 않으며 입맛이 까다롭고 더위를 끔찍이도 많이 타던 그 애를 모르는 셈 치자.
관두자.
노력을 멈추고 돌아서자.
끝내자.
8
관계는 두 사람의 노력으로 성립된다. 바꿔 말하면 둘 중 하나라도 애쓰지 않으면 관계는 유지되지 않는다.
9
어릴 적엔 둘 사이 특별한 갈등이 없다면 우정은 영원히 지속되는 줄 알았다. 단순하고 패기만만한 믿음이었다.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 나 혹은 너의 사적인 사정으로도 관계가 중단되기도 한다. 내가 네게서, 네가 내게서 여전히 우정을 느끼고 있어도.
10
없어서 갈망했고 가져서 소중했던 것도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애호의 시절은 추억으로 분류되어 어느 순간 좋아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된다.
건전지로 움직이는 강아지 인형, 망설이느라 지원하지 못한 책 쓰기 모임, 해체하기 직전의 보이그룹을 좋아하던 같은 반 아이, 한 달을 기다려 손에 넣은 만화책, 지구 반 바퀴를 돌아 만나러 갔던 친구,
뮤지컬을 좋아하고 더위를 끔찍이도 많이 타던 Y.
언젠가 Y의 이름도 이 목록에 이름을 올릴지도 모른다. 어쩌면 당장 한 달 후에 Y를 떠올려도 쓸쓸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예전엔 되게 친했는데, 그때 참 자주 놀았는데 하며 훈훈하게 회상이나 할지도 모른다.
높은 확률로 그러기에 성공하겠지. 이전의 서운함, 속상함, 분노, 그리움, 외로움을 발견하고서 머쓱하게 어깨를 으쓱일 게 뻔하다.
알고 있다.
늘 그랬으니까.
망각이란 축복을 받은 인간답게 내 안의 Y는 점점 흐릿해질 거고, 그날이 오면 아마 아무렇지도 않을 터다.
나는 알고 있다.
눈 한 번 감았다 뜨는 찰나보다 조금 더 긴 시간. 시절인연이란 단어로 고상하고 성숙하게 포장할 수 있을 사이. 다 지나갈 마음.
전부 알고 있다.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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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