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 확실한 불호 후기다
정말이지 한국이 싫다.
끔찍하고 폭력적인 사건을 마주할 때보다, 그 사건을 엄중하게 다루지 않는 체제에 질려버렸다.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피해자의 무고함을 따지려 드는 행태를 목도할 때면 번번이 좌절하고 만다.
‘내 일’이 아니라도 그건 ‘내 일’이었고,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함께 분노하며 합리적인 대처를 요구하는 건 지극히 당연했다. 함께 살아가는 동료 시민으로서, 어쨌거나 대한민국에 발 딛고 사는 거주민으로서.
고등학생 때는 막연히 이민을 꿈꿨다. ‘막연히’라기엔 워킹홀리데이 정보도 찾아보고 영어 공부도 하려 애썼지만 결국 실행 문턱에는 가지 못했다. 의지 때문에, 라고 하면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보다 결정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첫째, 내가 늘 가고자 갈망했던 나라에 대한 로망이 깨졌으며 –이 시기에 나는 ‘한국인’은 아니라도 ‘한국어’로 된 창작물과 모국어로의 말하기, 소통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기는지 알게 됐다.-
둘째, 수술 이후 ‘철도 씹어 먹을,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건강한 20대’ 스테레오 타입에서 추방당한 탓이다.
‘젊고 아픈 청년’의 삶에 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차치하고, 어쨌거나 그 후 나는 여행을 계획하면 했지 이민을 고려하진 않았다.
그런데 최근, 정부의 악의와 무능으로 반복되는 일련의 사태들과 시민 사회에 대한 믿음이 완전히 붕괴되는 이슈를 잇달아 접하면서 ‘어딘가로 떠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샘솟았다.
과거처럼 ‘저곳으로 가고 싶다’가 아니었다. ‘이곳에 살고 싶지 않다’에 가까웠다. 그러니 고등학생 때처럼 명확한 저곳은 없었고, 그렇기에 오히려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이곳이 아니면, 소위 선진국이라고 불릴 수 있는 영어권 나라 중, 어디, 어디, 어디.
정착 가능성이나 현실성 따위는 잠시 미뤄두고서라도, 몸부림에 가까운 정보 검색이 얼마간 이어졌다. 영화 「한국이 싫어서」는 그 시점에 개봉되었다.
영화의 원작 소설은 2018년도에 읽었다. 당시 정말 ‘한국이 싫어서’ 읽었고, 그런 것치고 뚜렷한 감상이 남진 않았다. 뭔가 애매해, 이 소재로 기대한 만큼의 내용물이 없어. 하지만 그땐 지금보다 모호한 감정을 세밀하게 풀어내는데 훨씬 서툴렀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기에 그저 그런 평만 남기고 지나갔다.
그리고 2024년. 원작의 흐릿한 이미지만 기억한 채 영화를 봤다. 공교롭게 진짜 한국이 싫어서, 그래서 봤다.
하…….
주인공 계나는 전형적인 한국 장녀다. 바꿔 말하면 그는 굉장히 ‘정상적인’ 삶을 살았다. 명문대, 사원증을 찍고 출입하는 그럴듯한 기업 소속, 수도권 출생, 오래 사귄 남성 연인. 하지만 그는 그런 현실에 압박감과 부자유를 느끼고, 결국 뉴질랜드로 떠난다.
영화는 떠나기 전 한국에서의 삶과 떠난 뒤 뉴질랜드의 삶을 교차해서 보여준다. 한국에서의 계나는 연인의 가족에게 부의 차이에서 비롯된 모멸감을 느끼고, 뉴질랜드에서의 계나는 외국인 노동자이기에 겪는 부당한 지적을 당한다.
영화는 떠난 뒤의 삶보단 ‘왜’ 떠났는지에 더 집중한다. 무엇에 초점을 맞출진 감독의 재량이니 상관없다. 하지만…….
계나의 삶에서 별 의미 없는 남자들이 우르르 등장해야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외국인 노동자로서, ‘떠나온 곳도 천국은 아니지만 그래도’를 이야기하고 싶었다면 차라리 다른 인물을 배치하는 게 나았을 텐데.
영화에선 계나가 어떻게 뉴질랜드에서 적응하고, 어떻게 외국어를 훈련했으며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는지는 조명하지 않는다. 대신 남자들-특히 한국 남자-을 계속해서 조명한다.
첫 식당에서 만난 아르바이트생, 인도네시아에서 온 부잣집 아들, 어학원 동기…… 귀국한 계나가 전 애인의 집에서 자는 장면이 나왔을 땐 진심으로 경악했다. ‘대체 왜?’ 감독은 이런 일련의 장면이 대체 이야기에서 어떤 기능을 하길 바라며 배치한 걸까.
한국을 떠나서 이런저런 남자를 만나도 괜찮다고? 설마 2020년대에 그런 낡은 소리를 설파하고자 하진 않았을 테고-바라건대-.
차라리 계나처럼 고국을 떠나 뉴질랜드로 왔지만, 떠나 온 환경과 계기는 다른 여성 조연들이 있었다면 이야기는 더 풍성해졌으리라. 누군가는 아니라고 반론할지 모르나, 그러면 위의 저 남자들은 서사에서 어떻게 기능하나? 그 역할이 정말 주제 의식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나?
심지어 나는 이 영화의 주제 의식이 무엇인지조차 모르겠다. 무엇을 말하는지 모를 공허한 장면-얄팍하게 그려낸 한국인 이민 가정, 촬영물 유포로 대관절 수사를 받는 상황 등-이 조각조각 이어 붙여진다. 장면은 서로 작용하지 않고서 흩어진다. 아무것도 남지 않고서.
누군가는 그 분절된 장면에 어떤 맥락 혹은 감정을 부여할지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나는 아니다. 물론 영화가 모든 걸 설명할 필욘 없고, 관객이 깊이 고찰해야 하는 이야기 자체를 싫어하지 않는다. 하지만 최후의 질문을 관객에게 돌리려면 상영 시간 동안 관객과 그만한 교류를 해야 한다. 장면들을 쌓아가며 궁극적으로 도달할 서사에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조각조각 나열된 장면은 의도적인 연출이 아니라 무성의한 화면 전환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주연 배우의 치밀하고 입체적인 연기가 돋보일수록 영화의 의아한 흐름은 더더욱 아쉬워졌다. ‘한국이 싫어서 뉴질랜드로 떠난 20대 여자’, ‘영어권 국가에서 아시안 여성으로서의 삶’, 여성-외노자-아시안 등의 층위를 파고들면 훨씬 다채로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않은 걸까 못한 걸까?
아, 원작을 영화로 각색한 장건재 감독은 과거 연출한 ‘한여름의 판타지아’에서 여성 배우에게 고지하지 않고 키스신을 촬영한 바 있다. ‘영화와는 상관없는’ 얘기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