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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울매미 May 21. 2023

너도 때때로 넘어지고 깨지겠지

현경이랑 세상 읽기

*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3년 5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복직을 했다. 우울증과 공황장애로 1년 2개월을 쉬는 동안, 복직을 할 것인가, 학교를 영영 떠날 것인가에 대한 길고도 진지한 고민을 거쳐, 시간이 가르쳐 준 답에 따라 복직을 했다.


     휴직 기간은 소중한 시간이었다. 많이 아팠고, 많이 방황했고, 많이 슬펐지만, 온전히 내 것으로 내 앞에 펼쳐진 하루하루를 치열하게 실존(實存)해 살았다. 그 기간 책을 실컷 읽었는데, 어떤 문장들은 마음 깊이 자리 잡아 지워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어쨌든 무릎이 깨졌다는 건 사랑했다는 뜻이다.’
- 안희연, 『당신이 좋아지면, 밤이 깊어지면』, 157쪽


     그렇구나. 사랑했다는 뜻이구나. 내가 넘어져 상처가 난 건 사랑했다는 증거구나. 나는 늘 떠나고 싶어 하면서도 사실은 이 일을 사랑했구나. 학교를, 학생들을 사랑했구나.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 일터를 존엄한 곳으로, 민주적이고 합리적인 곳으로 가꾸어 가는 일을 사랑했던 거구나. 그래서 그토록 깨졌던 거구나.


     ‘깨진 무릎’으로 복직을 해서 새로운 학생들을 만났다. 중학교 2학년 남자 반의 담임이 되어 일주일 정도를 보낸 뒤 이 글을 쓰고 있다. 고단하지만 행복한 일주일이었다. 다치고 아파 본 후 학생들과의 만남은 예전과 분명 다른 데가 있다.


‘깊은 어둠에 잠겼던 손이 이전과 같을 리 없으므로 / 그 손이 끈질기게 진흙덩어리를 빚을 것이므로’
- 안희연, 「아침은 이곳을 정차하지 않고 지나갔다」 중에서


     5년 전, 다른 중학교에서 2학년과 3학년 남자 반 수업을 들어갈 때, 나는 남학생들의 장난과 산만함, 삐딱함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제는 중2 남학생들의 끊임없는 장난과 산만함, 삐딱함이 어쩐지 조금도 짜증스럽지가 않다. 오히려 귀엽고 사랑스럽다. 그리고 한 사람 한 사람이 짠하고 안쓰럽게 느껴진다. 내가 마주한 이 꽃다운 청춘들 앞에서 나는 속으로 생각한다. 


      지금 이 자리에 있기까지 너는 어떤 하루하루를 건너, 어떤 사연을 품고 살아왔을까. 어떤 기쁨과 슬픔을 간직하고서 너는 여기에 있니. 네 안의 생각과 감정을 누가 감히 함부로 판단할 수 있을까.


     네 앞에 긴 생(生)이 펼쳐져 있구나. 너도 때때로 무릎이 깨지겠지. 너의 손은 어느 땐가 깊은 어둠에 잠길 거야. 너도 많이 아파하고 방황하고 슬퍼하겠지. 그래도 네 손은 끈질기게 진흙덩어리를 빚을 거야.


     이들 한 명 한 명의 삶의 무게를 생각하노라면 눈물이 난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너무 귀해서 가슴이 저릿하다. 전에도 안 느껴 본 느낌은 아니지만 이토록 진하게 느끼지는 못했었다. ‘깊은 어둠에 잠겨 본 손이 이전과 같을 리 없으므로’. 깊은 어둠에 잠겨 본 마음이 이전과 같을 리 없으므로.


‘깨진 유리들이 모여 손이 된다 // 단단한 두 손으로 / 버티면서 짓고 있었다’
- 안미옥, 「덧창」 중에서


     내 앞에도 긴 생(生)이 펼쳐져 있다. 앞으로도 난 때때로 무릎이 깨질 것이다. 나의 손은 또 깊디깊은 어둠에 잠길 것이다. 어쩌면 오래오래 잠길 것이다. 그러고 나면 이전과 같지 않아진 손이, 조금 더 넓고 따뜻해진 손이 끈질기게 진흙덩어리를 빚을 것이다. 깨어진 마음 조각들이 모여서 된 ‘단단한 두 손으로 / 버티면서’ 살고 사랑할 것이다.


     그러다가 헷갈릴 땐, 길을 물어봐야겠다. 날마다 교실에서 마주하는, 나의 학생 동지들에게. 그 명랑한 웃음들로 내 삶을 밝게 비춰 봐야겠다. 


그림_박현경, 「네가 보고 싶어서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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