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경이랑 세상 읽기
* ‘인권연대 숨’ 소식지 2024년 3월호 ’현경이랑 세상 읽기‘ 꼭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제목: 새벽과 참여 / 글쓴이: 박현경(화가, 교사)
이르면 네 시 반, 늦으면 다섯 시 반. 나의 새벽이 시작된다. 좁은 관사(官舍) 방 한쪽 바닥에 펼쳐진 종이 위에 슥슥삭삭 색연필 선을 얹는다. 물을 쓰지 않으면서도 마치 수채화처럼 번지는 듯한 효과가 나도록 가늘고 곧은 선을 교차해 긋고 또 긋는다. 색과 색이 만나 이루는 또 다른 세계. 선을 긋고 또 긋는 사이 창밖이 밝아 오고, 일곱 시가 되면 작업을 멈춘다. 출근 준비를 시작할 시간이다.
다이어리 속 달력에 일정이 빼곡하다. 퇴근 후 약속이나 회의가 없는 날을 찾기가 힘들다. 그만큼 여러 일에 참여하며 살고 있다.
특히 올해는 전교조 충북지부 음성지회장으로서 지회 조합원 선생님들께 실질적으로 도움을 드리는 방향으로 지회 운영을 잘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전교조와 교육청이 맺은 단체협약을 소홀히 여기고 위반하는 학교장 및 유치원장들에게 지회장으로서 취할 수 있는 조치를 취하고, 지회 내 선생님들이 당연한 권리를 당연하게 누리시도록 하고 싶다. 선생님들이 모여 자유롭고 속 시원하게 소통하며 교육 현실을 개선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연수나 집담회도 열고 싶다. 그리고 가장 가까운 곳인, 내가 속해 있는 학교에서부터 불합리하거나 비민주적인 일이 없는지 지켜보고 잘못된 건 잘못됐다고 말할 줄 아는 침착하고 용기 있는 사람이고 싶다.
학교에서 한국어학급 담임으로서 중도입국 학생들이 마음 편히 한국어를 배우고 학교에 잘 적응하도록 돕고 싶다. 한글을 배우는 데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T가 무사히 한글 읽고 쓰기를 뗄 수 있도록 ‘더 배움 한글 교실’을 알차게 운영하고 싶다. 한국어학급 학생들이 모두 만족해하며 신나게 즐길 수 있는 체험학습을 기획해 다녀오고 싶다. 또한, 국어 교사로서 학생들이 자신의 생각을 당당히 말하고 진솔하게 글로 쓰는 능력이 실질적으로 향상되는 데 기여하는 수업을 하고 싶다.
한편, 시민으로서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싶다. 정치는 우리의 일상 구석구석에 특히 가난한 이들의 삶에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영향을 미치므로, 정치 문제에 둔감해지지 않고 싶다. 비록 정치 기본권이 심각하게 제한되어 있는 교사의 신분이지만, 법이 허락하는 테두리 안에서는 적극적으로 나의 권리를 행사하고 의사를 표현하고 싶다. 이를테면 투표로 말이다. 제대로 알고 제대로 행동하려면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알아야 하기에, 믿을 만한 언론을 통해 뉴스를 접하는 일도 게을리할 수 없다.
이렇게 여러 모로 ‘진심’이다 보니, 참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회의에 참석해 많은 의견을 접하고 많은 의견을 내며 살고 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사회생활은 고요한 새벽과 놀라울 정도로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나의 새벽은 지극히 개인적인 시간인 동시에 세상과 연결된 시간이기 때문이다. 좁은 방에 틀어박혀 그림 그리는 시간이 어째서 세상과 연결된 시간이냐고 묻는다면 설명하기가 쉽지 않지만, 확실한 건 이 시간 동안 내가 그 어느 때보다도 세상과 연결돼 있는 느낌을 받는다는 것이다. 또한, 이 새벽 시간은 내가 세상에 나가 현실을 마주하고, 필요하다면 용감히 싸울 수 있는 힘을 내게 불어넣어 준다. 슥슥삭삭 색연필 선을 얹을 때마다 마음속 깊은 곳에 차곡차곡 쌓이는 용기가 있다.
그렇게 용기가 돋아나는 동안, 그림의 내용도 나를 세상과 연결해 준다. 예를 들어, 내 그림에는 눈 주위에 여덟 개의 작은 눈을 달고 있는 천사가 등장한다. 눈 주위의 작은 눈들은 사실 처음에는 눈물이었고, 숫자 8은 무한대를 의미한다. 세상의 비극 앞에서 무한한 눈물을 흘리다 보니 그 눈물방울들이 무한한 눈이 된 것. 우리가 세상의 비극 앞에서 함께 울 때, 우리의 눈물이 곧 또 하나의 눈, 또 하나의 증인이 된다. 천사는 무조건 착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라 세상의 비극을 눈 똑바로 뜨고 마주하며 그 슬픔에 참여하는 존재일 것이다. ‘천사 같은 사람’이란 바로 그런 사람일 것이다.
이르면 네 시 반, 늦으면 다섯 시 반. 나의 새벽이 시작된다. 좁은 관사 방 한쪽 바닥에 펼쳐진 종이 위에 슥슥삭삭 색연필 선을 얹는다. 주인공을 그릴 때만큼이나 배경을 그릴 때에도 촘촘한 선을 긋는다. 무엇이 더 중요하고 덜 중요한지 함부로 구분하지 않는다. 오늘 마주치는 일들 가운데서도 나는 이 새벽 선을 긋듯 차근차근 그러면서도 치열하게 세상을 마주하고 그 속에 뛰어들 것이다. 어느덧 창밖이 밝아 오고 이제 나갈 준비를 할 시간. 가슴속에 조용히 용기가 꿈틀댄다.
그림_박현경, 천사 4(부분 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