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너머
* <공동선> 제178호 ‘두려움 너머’ 꼭지 게재 글입니다.
나는 언제나 그릴 것이다 / 박현경(화가, 교사)
0. 오늘은 그림 이야기를
폭풍우 같은 반년을 보냈다. 그 어느 때보다 바쁘게 활동하면서 성취감을 느꼈지만, 그러면서도 또 엄청난 무력감에 시달렸고, 많이 울었고, 많이 아팠다. 녹록하지 않았던 그 나날을 되돌아보면 일관되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그것은 바로 이른 새벽 또는 저녁 시간 관사(官舍) 방에서 그림 작업을 이어 가던 나의 모습이다. 폭풍우 같은 시기, 내 인생에 몰아치는 비바람을 맞아 가며 꾸준히, 묵묵히 작업을 했다. 덕분에 그 시기를 무사히 보낼 수 있었다. 그만큼 그림 작업은 내게 소중하다. 그래서 오늘은 그림 이야기를 해 보려 한다.
1. 다양한 이야기로
나는 내 그림이 다양한 이야기로 해석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구상을 하고 작업을 진행할 때 딱 하나로 정해지지 않는, 여러 가지로 해석 가능한 방식으로 표현하려고 한다. 예를 들어 <천사 11>에서 이 천사의 표정은 슬픈 표정일까, 졸린 표정일까, 자애로운 표정일까, 어떤 표정일까? 왜 이 천사의 발은 꽃으로 되어 있을까? 아니, 꽃이 맞기는 맞나? <천사 12>에서 천사는 지금 어떤 감정 상태일까? 가슴의 짙은 자국은 무슨 뜻일까? 왜 두 눈이 서로 다른 색깔일까? <천사 11>과 <천사 12>에서 천사의 코와 입은 왜 짐승의 코와 입일까? 귀가 왜 하나는 위쪽에 하나는 아래쪽에 붙어 있을까? 바탕의 촘촘한 그물 무늬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을까? 그 밖에도 수많은 질문들이 나올 수 있다. 이 질문들에 대해 작가인 나의 답이 존재할 수는 있겠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한 개인의 답일 뿐 정답은 아니다. 사실 정답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작품을 보는 이들이 질문을 떠올려 스스로에게 던지고 나름의 답을 생각한다면 그 각각의 답이 모두 의미 있는 해석이다.
하나의 작품을 열 사람이 바라보면 열 개의 작품이 생겨나고, 백 사람이 바라보면 백 개의 작품이 생겨난다. 작품은 그 작품을 바라보는 이의 시선 속에서 비로소 완성된다. 나는 내 그림을 보는 이들이 바로 그 경험을 하기를 바란다. 자신의 시선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한 방식으로 완성되는 작품을 바라보는 경험. 이 그림을 다른 이들이 어떻게 바라보고 어떻게 해석할까 궁금해하며 차곡차곡 선을 쌓고 색을 더하는 과정은 참 행복하다.
2. 세상 사람들과 함께
처음 그림에 집중하기 시작했을 때 나의 관심은 주변 사람들과 사물들에 있었다. 일상 속 장면을 포착해 나만의 방식으로 변형하여 표현하는 과정에서 즐거움을 느꼈다. 그러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로 인한 정신적 어려움 속에서 ‘인생의 쓴맛’을 전에 없이 깊게 느끼게 되면서는 내면 깊은 곳에 숨어 있는 자아의 다양한 면모를 괴물의 모습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에 한동안 몰두했다.
그렇게 ‘나의 일상’ 그리고 ‘나의 내면’으로 침잠하던 내가 더 넓은 바깥세상으로 주의를 돌리게 된 계기는 2022년 10월 29일 있었던 이태원 참사였다. 이태원 참사로 자식을 잃고 울부짖는 유가족을 텔레비전에서 보고 세월호 참사, 이태원 참사 등을 비롯한 여러 사회적 참사 유가족들의 아픔에 주목하게 됐다. 그리고 그분들과 연대하는 마음으로 ‘네가 보고 싶어서’ 연작 작업에 몰두했다. ‘네가 보고 싶어서’ 연작에 부쳐 다음의 시를 쓰기도 했다.
네가 보고 싶어서, 너무 보고 싶어서,
내 몸통에 커다란 눈이 돋았다.
네가 보고 싶어서, 너무 보고 싶어서,
내 눈물방울마다 작은 눈이 돋았다.
네가 보고 싶어서, 너무 보고 싶어서,
심연 속을 헤맨다, 헤엄쳐 간다.
이 시와 함께 ‘네가 보고 싶어서’ 연작들을 모아 2023년 8월 <네가 보고 싶어서>라는 제목으로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에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어 눈물 흘리며 땅을 향해 내려오는 천사 그림도 있었다. 전시를 보신 분들 중 많은 분들이 관람 소감을 적어 주셨는데, 그중 다음 두 글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보면서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날 것 같았습니다. 요즘 많은 소식들을 접하며 밑도 끝도 없는 슬픔을 느낄 때가 많았는데 그 슬픔을 어떻게 할지 몰라 고민했습니다.
‘천사’는 눈물을 흘리기에 천사구나. 전시를 보고 나니 나의 괴로움이 쓸모없는 것 같지 않아졌습니다.
혼자서는 살 수 없음을 공감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작가님의 작품을 감상하며 무의식 속에 내재된 다양한 감정들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보고 싶지만 볼 수 없는 대상들을 떠올려 봅니다. 침묵으로 그림을 응시하며 그리운 대상과 대화하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도 나의 그림이 세상 사람들을 담아내고 세상 사람들과 공감하는 하나의 현장(現場)이 되길 바란다.
3. 과정부터 작품, 배경도 주인공
내가 작업하는 방식은 효율성 면에서는 낙제점을 받을 것이다. 드넓은 면적을 채우기 위해 가늘고 짧은 색연필 선을 차곡차곡 쌓아 나가기도 하고, 크레용으로 팥알 크기 동그라미들을 빼곡하게 그려 130×200cm 면적을 채운 뒤 다른 색 크레용으로 같은 작업을 반복하기도 한다. 이처럼 나는 주로 시간과 노력이 많이 들어가는 방식들을 택한다. 그 이유는 그렇게 우직하고 성실하게 화면을 채워 나가는 과정, 반복적이면서도 매번 조금씩 달라지는 움직임, 선을 긋고 또 긋는 행위부터가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한, 작품의 주인공 격인 존재를 형상화할 때든 배경을 그릴 때든 동등한 정성과 노력을 기울이곤 한다. 그러면서 ‘과연 무엇이 주인공이고 무엇이 배경인가? 무엇이 주요한 존재이고 무엇이 부수적인 존재인가?’라는 물음을 끊임없이 던지는 것이다. 나는 내 그림의 어느 한 구석을 캡처해 놓아도 그 자체로 하나의 작품이 되기를 바란다. 마찬가지로 내 삶 속 여백 같은 어느 한 순간도 그 자체로 더없이 소중한 완전체라 여긴다.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이 대단해 보이든 그렇지 않든, 유명하든 그렇지 않든, 그 자체로서 소중한 주인공이라 믿는다. 주인공은 없다. 아니, 모두가 주인공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오늘도 아낌없이 선을 긋는다.
4. 나는 언제나 그릴 것이다
여름방학이 끝나 간다. 개학을 하면 또 새로운 폭풍우가 나를 맞아 줄 것이다. 나는 또 때론 성취감을 때론 무력감을 느껴 가며, 때론 즐거워하고 때론 아파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리고 나에게 그 어떤 상황이 펼쳐지든, 그 무엇이 오든, 나는 새벽마다 저녁마다 묵묵히 선을 긋고 또 그을 것이다. 다양한 이야기로 해석되는 그림을 그릴 것이다. 그림을 통해 세상 사람들을 담아내고 세상 사람들과 소통할 것이다. 그리는 과정부터 작품임을, 배경도 주인공임을, 나의 행위로써 표현할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