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너머
* <공동선> 제179호 ‘두려움 너머’ 꼭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제목: 천사와 함께 창밖 세상에 / 글쓴이: 박현경(화가, 교사)
2023년 12월 24일 일요일
새벽 6시경부터 아침 10시 반까지 쉬지 않고 작업. 캄캄한 창밖으론 조용히 눈이 내리고, 작업실에는 김필선의 노래가 흐르고, 왕순이는 작업실 한켠에 얌전히 앉아 있고, 봉순이는 작업 중인 그림 위로 자꾸 올라와 내 손을 쫓아다니던 오늘 새벽. 시간이 가는지 어쩌는지도 모르게 작업에 집중해 있는 사이 어느덧 창밖이 환해지고 그림이 진척되었다. 지극히 평범하고 조용하지만 그 어떤 파티보다 풍성하게 내 마음을 채워 준 크리스마스 이브의 오전.
2024년 1월 2일 화요일
새벽 작업 기록. 5시 50분부터 6시 15분까지. 새로운 작품의 스케치 시작. 오늘의 한 순간 한 순간을 차근차근 풀어 나가자. 완벽해지려 하지 말자. 차근차근, 차근차근.
2024년 1월 11일 목요일
새벽 작업 기록. 4시 30분부터 6시 30분까지. 요즘 매일 새벽 작업을 했는데 기록은 잘 남기지 못했다. 파리에 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도 이 작품이 이번 전시작 중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다. 모든 두려움과 의구심을 헤치고 나아가자. 다만 뚜벅뚜벅 나아가자.
2024년 4월 1일 월요일
새벽 5시 10분부터 6시 40분까지 작업. 행복하고 감사하다. 이 시간 동안 선을 슥슥삭삭 차분하게 그었듯 오늘 내 앞에 펼쳐진 그 많은 일들도 그렇게 차분히, 즐겁게.
2024년 4월 12일 금요일
새벽 5시부터 5시 59분까지 작업. 스케치. 설렘.
어제는 일하면서 ‘뭣이 중헌디! 뭣이 중헌디!’ 싶은 답답하고 짜증스런 상황을 여러 차례 마주했다. 나이스하게 그러나 할 말은 다해 가면서 넘어서고 넘어서고 넘어서기!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기에 퇴근 후 봄베이 한 글라스에 컵라면 한 사발 진하게 꺾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고 나서 일어나 스케치하는 새벽.
오늘도 모든 일이 다 순조롭지는 않겠지만 결국은 모든 일이 다 잘될 것이다.
2024년 4월 24일 수요일
화가 나서 엉엉 울어 버리고 싶은 요즘. 새벽에 그림 그리는 시간이 없었으면 진짜 어쩔 뻔했나. 화가 많아진 걸 보니 내가 지치고 있나 보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거다.
2024년 8월 16일 금요일
130x200cm 사이즈 작업. 방금 전 배경 2단계까지 완료. 종이를 재단한 게 8월 5일이었으니 배경 2단계까지 완료하는 데에 총 12일이 걸렸고, 그중 4일은 하루 7시간 정도씩 집중적으로 작업했다. 다른 날들은 약속이 있거나, 집회가 있거나, 마감해야 할 원고가 있거나, 만들어야 할 웹자보가 있거나 해서 하루 종일은 못하고 틈나는 대로 작업을 했다. 다른 일을 하는 순간들에도 머릿속에는 언제나 이 작업이 있었다.
작업대 앞에 앉아 크레용으로 선을 긋는 그 모든 순간이 너무나 소중하고 감사하다. 이제부터 3단계 시작이다! 3단계까지 배경 작업 하고 나서 그 위에 새로운 천사 친구가 그려질 것이다.
2024년 8월 20일 화요일
새벽 작업 기록. 오전 5시 10분부터 7시 10분까지. 지금까지 했던 것 중 가장 큰 작업이라서 작업하는 순간순간이 설렌다. 오늘도 참 기쁘고 감사하게 하루를 시작한다.
2024년 9월 4일 수요일
어제 배경 작업을 3단계까지 마치고 오늘 새벽 천사의 형태를 잡았다.
창밖 하늘이 밝아 오는 동안 나는
더듬더듬 미로 속 천사를 그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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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개월간 때론 거의 매일, 때론 일주일에 한두 번씩 쓴 작업 일기를 찬찬히 읽는다. 이 일기들을 쓴 기간, 나는 파리에 가서 전시회를 하고, 돌아와선 여러 차례 집회에 참가하고, 학교 내 단체협약 준수 투쟁을 하고, 지회장으로서 교육지원청과 정책협의회를 하고, 심한 우울과 불안으로 위기를 겪었다가, 교육지원청 규탄 1인 시위를 하고, 다시 건강을 찾고, 동지들과 함께 울고 웃었으며, 학생들에게는 간식이랑 칭찬을 실컷 나눠 주었으니, 참으로 다사다난한 나날을 살았다. 그리고 그 나날 동안 끊이지 않게 작업을 했다. 이 다사다난함을 무사히 건너올 힘을 나는 작업에서 길어 올렸다. 색연필로, 크레용으로 차분히 선을 긋고 또 긋는 사이 용기가 솟아나곤 했다. 4월 24일 일기에 썼듯이, ‘새벽에 그림 그리는 시간이 없었으면 진짜 어쩔 뻔했나.’
올해 초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간부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내가 걱정했던 부분은 활동가로서의 삶과 예술가로서의 삶이 서로 부딪치지 않을까 하는 점이었다. 감각과 감수성으로 그림 그리는 사람인 내가, 냉철함을 요하는 노동조합 간부 역할에 잘 맞을까. 또한, 지회장으로서의 활동이 창작에 지장을 주지는 않을까. 몇 개월이 지난 지금, 그 걱정은 완전히 기우(杞憂)였다는 걸 나는 안다. 나는 날마다 새벽 작업을 통해 하루의 투쟁을 위한 새 용기를 얻었고, 노동조합 활동과 투쟁은 내 작업을 세상과 이어 주고 더욱 풍부하게 해 줬으니 말이다. 특히 최근의 ‘천사’ 연작은 활동가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어떻게 싸우고 어떻게 사람들과 함께할 것인가에 대한 깊은 고민을 담아서 작업하고 있다. 이처럼 나의 ‘작업’과 ‘활동가로서의 삶’은 분리할 수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피부처럼 밀착하여 서로를 더 풍부하고 건강하게 해 주는 관계다.
오늘은 한글날, 휴일이다. 새벽뿐만 아니라 종일 마음껏 작업할 수 있는 텅 빈 하루를 맞이할 기대로 어젯밤엔 가슴이 설레기까지 했다. 기대했던 텅 빈 하루가 펼쳐지고, 나는 이른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작업을 했다. 맑은 가을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관사 방에 엎드려 크레용 선을 긋고 또 그었다. 크레용과 종이가 부딪치며 나는 슥, 삭, 슥, 삭 소리가 기분 좋게 반복되고, 크레용 색들이 미묘하게 섞이며 새로운 세계를 열었다. 어울릴 것 같지 않던 색깔들이 서로 얽히고설켜 빚어내는 그 새로운 세계에 자꾸만 마음을 빼앗기며 나는 작업을 계속했다. 그러다 산책을 나와 근처 카페에서 지난 일기들을 읽고 이 글을 쓴다. 오늘은 또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날로 일기장에 적히겠지. 이제 다시 관사로 돌아가 작업을 계속할 것이다. 지금 그리고 있는 그림은 ‘천사 14’. 오늘 진행 중인 배경 작업이 끝나면 그 위에 새로운 천사 친구가 그려질 것이다. ‘창밖 하늘이 밝아 오는 동안 나는 / 더듬더듬 미로 속 천사를 그렸네.’ 그렇다. 나는 창밖 하늘이 밝아 오는 동안 더듬더듬 미로 속 천사를 그릴 것이다. 그리고 그 천사와 함께 창밖 세상에 나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