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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and Jan 03. 2025

피의 연대 (서브스턴스)

영화 속 '피' 돋보기

 영화 <서브스턴스>는 그 제목처럼 ‘실체’란 무엇으로 이뤄지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그 물음의 전제는 자신을 보존하려 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에 의해 주체를 상실할 수 있는 타자성을 동시에 지니는 인간 존재의 모순성이다. 영화는 부조리한 인간의 존재성으로 인해 주체가 어떻게 파국으로 향하는지를 그린다.   


 영화에서 엘리자베스 그 자신으로서 주체다. 하지만 그 주체로서만으로 존재하지 못한다. 자신을 나이 든 퇴물이라고 여기는 방송국 연출자의 시선과 그 연출자가 대변하는 젊은 여자를 원하는 화면 너머 남자들의 눈, 그런 타자들의 시선은 결국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과 동일시된다. 그때부터 엘리자베스는 그 주체로서 자신을 보지 못한다. 오히려 타인의 시선으로 본 자기 자신은 낯설고 자신을 퇴물로 본 사람들의 생각처럼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엘리자베스의 등을 가르고 나온 수는 타자화된 엘리자베스의 또 하나의 주체다. 


 원래 주체인 엘리자베스와 타자성이 반영된 수는 양극단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모체는 엘리자베스다. 엘리자베스가 스스로를 타자화한 것은 결국 자신의 선택이며 그 결과로 수가 탄생한다. 원래 하나의 주체였던 존재가 2개로 나뉘며 갈등이 시작된다. 주체를 잠식당하지 않으려는 엘리자베스와 엘리자베스를 대신 주체가 되려고 하는 수. 엘리자베스와 수 모두 아는 것은 결국 주체인 엘리자베스가 온전해야 엘리자베스와 수 모두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와 수 모두 그 사실을 애써 외면한다. 본질을 보는 눈을 감고 대신 타자들의 눈이 원하는 모습을 찾는다. 그건 엘리자베스가 아닌 ‘수’다. 수는 모든 것을 그만두고 자신을 없애려는 엘리자베스를 결국 죽이게 된다. 


 수는 누구인가. 타자의 시선에 잠식당한 엘리자베스다. 타자의 시선과 욕망이 투영된 엘리자베스의 몸이다. 타자의 욕망을 상징하는 수 역시 엘리자베스의 선택으로 만들어졌고, 여러 번 체험을 끝낼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은 것 또한 엘리자베스 자신이다. 타자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이 뒤섞일 수밖에 없는 서글픈 인간 본질을 말하거나 한 사람의 비극적인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피로서 연대 책임을 묻는다.  


 영화는 피를 아끼지 않는다. 이제껏 진짜로 본 피와 영화에서 가짜로 본 피를 다 합쳐도 종반 시퀀스에서 본 피의 양의 반의반에도 못 미칠 것이다. 그러다 보니 두려움이나 아픔 등 피가 지니는 통상적인 의미는 자연히 옅어진다. 피에 대해 무감각해지니 오히려 본질로서의 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피란 무엇인가.

 물질로서 피는 검붉은 액체다. 산소나 영양분을 실어 나르는 기능을 한다. 또 계속 몸을 돌며 몸을 구성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 점에서 피는 ‘존재’를 은유한다. 인종과 나이, 국가에 따라 피부색과 머리카락, 생김새는 다양하지만, 모든 인간의 피는 비슷한 모양과 기능을 한다. ‘피도 눈물도 없는 인간’이라는 관용구가 반증하듯, 모든 사람은 피를 가지고 있다. 영화에서 수가 활성제를 다시 써 나타난 것은 그야말로 괴물이다. 하지만 그 괴물도 피를 가지고 있다. 그것도 아주 많은 양의 피를. 그 괴물은 수많은 관객에게 그 피를 뿌린다. 피가 은유하는 존재성의 방향이 수많은 군중에게로 간다. 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괴물을 만든 것은 엘리자베스의 타자화된 욕망, 그 이전에 엘리자베스가 자신을 타자화하게끔 만든 사람들에 대해 퍼붓는 일침이다.    

   

 영화에서 줄곧 경고하듯 나오는 메시지 “remember we are one.”은 비단 엘리자베스와 수의 관계만을 가리키는 것만은 아니다. 엘리자베스와 수, 그사이 탄생한 괴물과 타자는 결국 한 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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