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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오후 4시

바닥과 바닥사이

by 빌려온 고양이


"러닝 하시나 봐요?"

"어떻게 아셨어요?"


나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

등산복을 일상처럼 입는 어르신을 비웃을 일이 아니었다. 러닝복을 휘감은 그도, 그 브랜드를 읽어낸 나도 참 어지간하단 생각이 들었다.


"영포티라서요."

그의 가슴에 떡하니 박힌 브랜드를 가리켰다.

"영포티라 조롱받기 전부터 해외직구하던 브랜드예요."

"전 영피프티입니다."

그제야 그가 적은 상담 신청서 속 나이를 확인했다.


으레 경력을 묻고 나서 내 출생 연도에서 그의 출생 연도를 빼고, 내 나이에서 그 차이만큼 더하는 사이 가습기 수분처럼 흩어지던 그의 목소리에서 회사 이름을 다시 건져냈다.


"여긴 굳이 왜 오셨어요?"


그는 해당 직무를 꿈꾸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망하는 회사 이름을 나열했다. 학교명을 말하지 않았는데도 학벌을 짐작할 정도였다.

절실하거나 절박한 건 아니었을 텐데 답답한 마음에 점집 들르듯 온 것 같아 에둘러 물었다.

반평생 삶을 두서없이 내뱉은 그가 말했다.


"뭘 해야 할지 몰라서요.”

“아실 텐데요.”

“붕어빵 장사도 할 수 있어요.”

"선생님은 그런 거 못하세요."


"정말 다 내려놓았어요."

회사명 뒤 그의 직함이 가슴팍에 박힌 브랜드보다 또렷해졌다.

"아니요. 못하세요."


내려놓음과 장사를 한 줄로 묶는 건 장사는 절대 못 할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내가 있는 곳을 찾아온 걸 보면, 큰 다짐을 한 건 틀림없었다.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죠? 물류센터라도 먼저 가보세요. 바닥이 뭔지 느끼게 될 거예요. “

공장 안에서 자각하는 일용직 돈벌이 삶을, 마스크 뒤로 가려진 익명성보다 더 숨기고 싶었던 비참함을 설명했다.


“비상 연락처를 적어내지도 못했어요. 아무에게도 알릴 수 없어서.”

관리자가 전화번호를 적지 않은 내게 부상이 아닌 사망 사고에 대해 안내했었다는 사실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_

일지를 기록하다가 그가 직접 입력한 정보를 확인했다. 통상 체크박스를 선택할 뿐인데 길게 내용을 기입한 사람은 그가 처음이었다.


- 챗GPT 말을 듣고 온 거치고 너무 진심이었네.-

스크롤이 한참을 내려간다. 그가 말하지 않은 경력과 학벌까지 선명해졌다. 이만하면 검색이 될만한 사람이었다. 구글에 이름을 입력했다. 업무 성과에 대한 기사뿐 아니라 개인 활동에 대한 내용까지 수년간의 자료가 쏟아졌다.


뭐야 이 사람?

내가 물류센터에서 일한 얘기를 굳이 하지 않았어도 애초에 그가 붕어빵을 파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지도에서 그의 집 주소를 무지성으로 검색했다.

손가락은 생각이 짧고 윤리보다 빠르다.


평면도와 함께 전월세, 매매가 정보가 펼쳐졌다.

그의 집 위에 내 집을 테트리스 맞추듯이 차곡차곡 채웠다. 그리고 그 안에 그와 나눈 대화를 굴림 10pt, 자간 -15%로 촘촘히 줄을 세웠다. 현관을 겨우 채우고 돌아 나와 거실쯤 다다랐을 때, 러닝 브랜드를 보고 소리 내 웃었던 것보다 길고 깊은 웃음이 새어 나왔다.


"한숨 쉬는 거예요, 웃는 거예요?"

옆에 앉은 띠동갑 동료가 물었다.


"오랜만에 같은 브랜드를 입고 같은 한강에서 뛰는 사람을 만났더니 반가워서요."

"좋았겠네."


'같다'는 말이 내가 겪어본 바닥과 그가 내려놓았다고 믿는 바닥 사이만큼 멀어진다.

그리고 아까와 달리 그가 입었던 브랜드가 그의 브랜딩처럼 흐릿해졌다.

오래전에 흐려진 내 꿈처럼.



사진출처: 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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