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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민선 Jun 04. 2021

파문 속에서 사람을 보다

'2021년 생명의 강 낙동강 수필공모전' 응모작

다가오고, 또 멀어진다. 물살이 햇볕을 머금어 반짝이고, 그 빛은 강가에 다다라 모래톱에 흔적을 남기고는 물러간다. 매 순간 다른 얼굴을 한 채 밀려오는 파문을 바라보고 있자면, 어느새 신발의 앞코가 촉촉해진다. 녹아 흘러내리는 아이스크림을 쥔 채 길가의 사람들을 구경하는 꼬마의 마음이 이럴까. 다만 다른 점이라면, 아이스크림과는 달리 강물은 더러운 얼룩을 남기지 않는다는 것. 내가 강을 좋아하는 이유다. 


물결이 밀려온다. 바람이 강해졌는지, 강가의 모래를 더욱이 밀고 들어와 나를 지나친다. 샌들이 질퍽해짐을 느끼는 동시에, 추억이 떠오른다.


‘나’라는 이름의 필름을 영사기에 돌려볼 수 있다면, 낙동강은 배경으로 꽤나 많은 지분을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이제는 단편적으로나마 남아있는 어린 시절에서, 가장 강렬하게 남은 기억들 중 하나가 낙동강의 작은 지류에 발을 담근 것이었으니 말이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도착한 산속의 이름 없는 절, 그리고 그 앞을 흐르던 청명한 개울의 인상은 아직까지도 내 발끝에 마르지 않는 물기로 남아있다. 내가 풍기던 분내를 품은 물은 어디까지 흘러갔을까.


흐르는 물결은 의식을 싣고 내려가다, 다른 무명의 개울들을 만나 이름을 가질 만큼 넓어졌다. 양산천을 거슬러 올라가는 피라미들이 보인다. 산란기가 되었는지 그들 몸 전체를 덮은 울긋불긋한 혼인색. 마침 돌아가고 있던 필름 ‘나’에도 비슷한 색이 등장한 것 같아, 잠시 영사기를 멈춘다. 어린이집에 다닐 때쯤의 시절이었을까,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채 송사리 한번 잡아보겠다고 기를 쓰는 내가 보인다. 바지를 무릎까지 걷어 올린 탓에 드러난 맨다리 너머로 느껴지는 물고기들의 지느러미 질. 그 수많은 얼굴 중 하나라도 붙잡기까지 얼마나 힘들었던지. 결국은 한 마리 잡아 이름까지 붙여주었더랬다. 


흐름은 이윽고 본류를 만났다. 상영이 시작됨과 동시에 하나씩 입에 주워 넣은 팝콘은 이미 바닥을 보인다. 필름 속의 나는 사춘기를 맞은 듯, 반항심 띤 얼굴 주변에 여드름의 흔적이 가득하다. 역변이라는 말이 적당할까. 반면 배경에 비친 낙동강의 모습은 변하지 않는다. 늘 고결하게 흐르며, 그에 따라 중후한 색을 띤다. 낙동강의 색. 특히 하류권의 깊은 물빛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치기 어린 가출을 감행했던 때가 있었다. 좁은 동네를 벗어나고 싶었고, 당시 내가 인지하던 반경에서 한참을 벗어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일탈은 채 하루를 넘기지 않았다. 하굿둑 다리를 건너다 강물을 내려다보고는, 그 길로 집에 돌아갔기 때문이다. 거대한 교각 주변을 짙은 남색의 물이 소리 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푸른빛과 조금 더 푸른빛의 사이 그 어디쯤. 그 빛을 보며 나는 잡념을 버릴 수 있었다. 괜찮다, 다 괜찮다고. 나를 아무 말 없이 보듬어 주는 어머니를 떠올렸던 것 같다.


물살이 물러간다. 발뒤꿈치에 얼마간의 저항감이 느껴진다. 회상이 끝나고 자리를 옮긴다. 보에 걸터앉아 발을 말린다.


‘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수 없다’는 구절이 떠오른다. 실로 맞다. 우리가 한때 발을 담갔던 강물은 이미 흘러버려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 내 분내를 품은 물을 다시 만날 수 없고,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이름을 붙여준 송사리는 다시 잡을 수 없다. 꼭 사람 살이 같다. 이미 지나간 세월과 스쳐 지나간 인연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렇기에 운명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힘이 그토록 큰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강은, 낙동강은 그 모든 것을 품고 흘러내려 간다. 자신이 태동한 개울에서부터, 마지막 걸음인 하구에까지. 셀 수 없는 이들의 추억과 체취를 끌어안는다. 우리들의 삶이 바다를 만나 제 갈 길을 찾아 흩어져 고유의 흐름을 만들어낼 때까지, 파문 속 사람들의 이야기가 길을 잃지 않도록 손을 이끌어준다. 힘이 들 때는 포근한 품을 내어준다. 


그렇기에 낙동강을 바라보고 있자면 어머니가 떠오른다. 낙동강의 모래톱 위, 강 표면의 파문에서 사람을 본다. 어머니를 만난다.


물결이 다가오고 또 멀어진다. 젖어있던 샌들은 어느새 다 말랐고, 그 어떤 얼룩도 찾아볼 수 없다. 이는 어쩌면, 우리가 이미 낙동강의 물들임 속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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