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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미림 May 28. 2023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한 건

  한동안 글을 쓰지 못한 건 공허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글을 쓴다는 것은 나의 공허, 나의 빈 마음을 채우기 위한 가장 좋은 수단이었거든. 삶이든 마음이든 사람 관계든 어딘가 훵-하고, 빈 것 같고, 또 그것으로 불안하여 흔들릴 땐 글자들로 그 빈 데를 채웠고, 불안한 두 다리를 붙들었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의 많은 것은 채워졌는가, 더 이상 불안하지 않은가, 자문해 본다면, 여전히 빈 데는 비어 있으나 불안하진 않다고 자답할 것이다. 비어있으나 불안하지 않다. 빈 데를 두고 더 이상 불안해하지 않는다. 진짜? 아니요, 불안합니다. 그런데 불안한 상태의 나를 부인하게 되더라고요.


  이 말도 안 되는 논리가 나에게는 왜 이렇게 또렷한 진리가 되었는가 생각해 보면, 처음에는 잦은 실패 때문이긴 했다. 해도 해도 안 되고, 채우려 해도 결코 채워지지 않는 깊은 웅덩이 앞에 주저앉아 오래도록 슬퍼했었다. 긴 슬픔 끝에서 나는 나의 완전한 절망을 확인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나를 붙들 수 없었다. 나 말고 다른 무엇인가, 나보다 강한 무엇인가를 붙들고 싶었기에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보다 강한 것들은 늘 많았다. 특히 사람. 어떤 이는 선한데 강하였고, 낮아진 나를 두고 불쌍히 여기며 도와주고자 했다. 또 어떤 이는 나에게 바른 것을 가르쳐줬고 혼도 내줬다. 그러나 그도 한계가 있었다. 나 바깥에 있는 누군가는 여전히 바깥에 존재하였고, 내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의 불안을 잠재웠는가. 끝없이, 마치 파도처럼 밀려오는 불안이 어떻게 부인되었는가. 나는 내 속에 들어온 나, 내가 아니어서 여전히 완전한 타인이지만, 내 속에 들어와 나 대신 살아가는 나를 믿게 되었던 것이다. 완전한 타인이 내 ‘속’에 들어와 나의 모든 불안을 대신 감당하니, 타인은 더 이상 타인이 아니라 새로운 내가 되었던 것이다.


  그 타인은 누구인가. 그가 누구이기에 불안한 나를 점령하고 저 먼 데에만 있는 것 같던 소망을 손에 쥐게 하는가, 묻는다면 나는… 그는 빛이었다고. 그는 여전히 들리는 말이었다고. 그는 걸어야 할 길이었고, 들어가야 할 문이었다고. 완벽한 희생이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그 타인이 여전히 내 속에 들어와 불안한 나를 부인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제 내 두발을 굳게 붙들어 주는 건 끄적이는 글자 몇 자가 아니라, 여전히 들리는 말이라는 것이다. 이 말도 안 되는 논리가 이해되는가 싶어 글을 마무리하면서도 걱정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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