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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가을 Sep 18. 2020

[언젠가는 써야만 했다] 미숙 3

용기

여느 때와 같은 저녁을 보냈다. 회사에서 저녁을 먹고, 야근을 하고, 터덜터덜 집에 돌아와 좁은 집 한켠에서 아주 작은 소리로 기타를 연습했다. 기타를 연습하던 중에 아주 작은 소리로 노래도 조금 불렀다. 분명 종일 특별한 일은 없었는데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했지만 뭐 머릿속이 상쾌한 날보다 정리 안 된 상태인 날이 많으니 오늘도 그렇고 그런 날에 불과하겠지 생각했다. 책이라도 좀 읽어 볼까 싶었지만 책을 펼치면 일이 생각날 것 같았다. 미처 다 끝내지 못한 업무, 마감에 맞추기 위해 주말을 반납하고 살펴야 하는 업무들. 고개 젖힐 틈도 없이 바쁜 날이 물론 있지만 오늘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왜 이럴까. 모든 불안과 괴로움의 원인은 그렇다면 나겠고, 역시 나구나 자책했다. 

멀뚱멀뚱 조금이라도 에너지가 필요한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어 가만히 모로 누웠다. 그때 엄마로부터 연락이 왔다. 밤 11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엄마는 내 이름을 부르더니      


수고했어 오늘도
굳나잇
   

하고 느닷없이 밤 인사를 건넸다. 덩실거리는 이모티콘을 찾아 보내고 즐거운 척 답장을 보내며 울었다. 불을 끄고 한참 울다가 잠이 들었다.


가족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지내고 있지만 본가에 잘 가지 않는다. 이런저런 핑계와 이유가 있지만 사실 이제 그런 것들에는 조금 무뎌졌다. 무뎌지긴 해도 사라질 감정은 아니라서 영원히 나의 이유가 될까? 핑계를 대고 이유를 찾는 일이 지겹다. 살아지는 대로 사는 것에 치가 떨린다. 누군가가 용기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선택하고 결정하고 표현하고 행동하는 일이 대단해 보이는 것은 어느 결정이나 그에 따르는 포기가 있고, 포기한다는 숨기고 싶은 명제를 실천할 때에야 선택 혹은 결정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그 모든 과정이 용기라는 것. 마음공부나 명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지금 나를 망치는 무언가가 욕심인지, 두려움인지, 부족한 용기인지 단지 그것을 고민하는 것이다. 혹은 또 다른 것인지.      


거짓말처럼 아침에 눈을 뜨니 방 한가운데에 무지개가 떴다. 부은 눈을 여러 번 홉뜨고 무지개를 봤다. 그리고 다른 날보다 최대한 군더더기 없는 움직임으로 출근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다음 달에는 연차를 내고 집에서 이틀이나 사흘 엄마와 있어 볼까? 연차는 낼 수 있을까? 그 2~3일 쉬는 것처럼 편히 쉴 수 있을까? 쉰 다음에는 괜찮아질까? 꼬리를 무는 생각에 어지러워질 무렵 회사에 도착했다. 연차 계획은 마감하면 그 이후에 생각해보기로 했다. 조금 이상한 형태의 용기가 생겼다. 각자의 자리를 몸으로든 마음으로든 치열하게 지키고 있는 이들이 용기를 얻었으면 좋겠다. 어떤 방식으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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