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잠해질 줄 알았던 코로나가 끊임없이 기승이다. 아무래도 올해 봄철은 이렇게 다 가버릴 것 같다고 생각하니 평소 생활과 아주 크게 다른 생활을 하고 있지 않은데도 숨이 잘 안 쉬어지는 느낌이다. 운동을 시작하자니 그만큼의 의지는 없고, 자기계발을 하자니 계발할 만한 내 소질을 찾는 일이 까마득하다. 하지만 뭔가는 좀 해보고 더욱 적극적으로 역시 이렇게 살아봐야 별거 없다고 여기고 싶어졌다. 그래서 요리를 하기로 했다. 속이 부대끼고 소화가 안 된 지 꽤 오래됐다. ‘안 아프고 적당하게 살기’를 급하게 목표로 삼고 이렇게 망가진 속에 무슨 음식을 넣어주면 좋을까 잠깐 생각했다. 엄마가 그랬지, 더부룩할 때 된장찌개만큼 좋은 게 없다고. 혼자 생활하며 요리다운 첫 요리는 된장찌개로 정했다.
집에 된장이 없다. 사실 간장도, 후추도 없다. 엄마가 그랬지, 된장찌개는 된장만 맛있어도 반은 한다고. 맛있는 된장을 당장 오늘 어떻게 사. 하지만 난 오늘 된장찌개가 먹고 싶은데. 역시 살아봐야 별 볼 일 없는 걸까. 더 기진맥진하기 전에 먹고 싶은 된장찌개 그림을 그려본다. 그 그림이 어지간히 어우러지게 그려지려면 재료는 파, 감자, 호박, 버섯, 두부, 마늘이 있어야 한다. 요리다운 요리...의 시작은 결국 된장찌개용 육수 구매. 그리고 나머지 재료들을 최소한으로 사본다. 최소한이라고 해봤자 마트에서 파는 채소들은 1인 가구로서는 거대한 덩어리들이라서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심정으로 가장 작은 묶음들을 산다.
집에 돌아와 채소들을 손질한다. 물에 씻긴 후의 야채들처럼 의외로 생기가 돋고 활력이 생긴다. 음식을 먹기 전인데 이상하게 속이 조금 든든한 기분이 든다. 작은 칼로 감자 껍질을 벗기고, 큰 칼로 재료를 손질한 후 하얀 접시에 반듯하진 않지만 나름 정돈되게 놓아본다. 손맛, 눈짐작 같은 건 내게 가능한 일이 아니라서 된장찌개용 육수(3~4인용)에서 제시하는 물의 양만큼 전기 포트에 넣고 끓인 후 냄비에 옮겨 담는다. 된장 내음에 파마늘 냄새가 이렇게 달근했던가. 물이 끓고, 잘 익지 않는 순으로 재료를 하나씩 넣는다. 감자, 호박, 버섯, 파, 두부... 보글보글 소리와 함께 사방에 꼬순내가 퍼진다. 고작 몇 평 남짓 되는 공간의 공기가 화려해진다. 작은 액자형 테이블을 펼치고, 나름 고르고 고른 나무 냄비 받침을 깔고, 찌개를 올린다. 그리고 지난 주말 엄마가 챙겨준 육전과 동그랑땡을 프라이팬에 살짝 데워 찌개 옆에 두고 김치를 꺼낸다. 제 역할을 못 하던 각기 다른 크기의 흰 접시들이 비로소 빛을 발한다.
솔직히 맛은 그냥 그랬다. 그런데 객관적인 평 같은 것은 못 하겠다. 왜냐하면 누군가 뚝딱 만들어버릴 찌개(심지어 구매한 육수를 사용) 하나를 붙잡고 나는 꽤나 오랜 시간 분주했고, 그 시간 동안 이미 재료부터 완성품까지를 오감으로 즐겼다. 요리가 재밌고 가치 있고 뭐 이런 건 잘 모르겠다. 단지 의미를 찾아야 하는 활동이 아니라서 좋았다. 정말 살기 위해 뭔가를 한 것 같은, 그러나 필사적이지는 않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과 앞으로 이 직종에서 언제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골몰하며 헉헉대는 매일에 지치고, 이걸 고민할 만큼 내 자리가 견고하지 않다는 생각에 자존감이 바닥나 있던 차였다. 빠르게 흘러가는 생의 속도에 발맞춰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골라가며 겨우 따라가고 싶지도, 끝자락에 매달려 대롱거리며 악다구니를 쓰고 싶지도, 그렇다고 저 선두에 서서 길을 내어가며 발자국 한번 들여다볼 시간 없이 내달리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내게 날 것의 야채를 만지는 순간이, 귀하게 다듬고 모양을 내서 자르고 내가 좋아하는 채소들의 조합을 직접 새롭게 만들어내는 순간이 조금 생경하고 기뻤다. 입버릇처럼 손재주가 없다는 말을 달고 사는 내가 잘 누려본 적 없는 일상의 기쁨이었고, 새로운 감각을 찾았다고 느낀 순간 살맛 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만으로도 요리는 성공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