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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lverrain Jun 29. 2020

하동을 걷다

한국의 알프스, 하동 여행기

Day 1




겨우내 손꼽아 기다려온 여행이다. 초록빛의 어린잎들이 무성해질 때쯤 꼭 하동의 차밭을 거닐자고 우린 약속했고, 그 날이 성큼 다가왔다. 언제나 그렇듯 구글맵을 펼쳐 동선을 살핀다. 우린 이번 여행에서 얼마나 걸을 수 있을까?



K와 나의 만남은 그동안의 걷는 일상을 묻는 근황에서부터 시작한다. 둘만의 비공식 모임인 ‘만 보 클럽’을 운영한 지 벌써 몇 달째. 각자 삶의 터전에서 하루에 만 보 이상을 꾸준히 걷는 습관이 일상 속에 자리 잡았다.

여행도 마찬가지이다. 남들처럼 맛있는 거 먹으러, 예쁜 사진 찍으러 가는 목적도 일부 있지만, 웬만하면 도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온종일 걷고, 그냥 별 생각 없이 쉬면서 소담한 대화를 나누는 그런 여행이 우리에겐 잘 맞았다.


재깍재깍 도착하는 대중교통의 편리함은 잠시 잊기로 하고 울퉁불퉁 길을 걸으며 차도 마음껏 마시고. 그렇게 여름 향기 물씬 풍기는 하동을 기대하며 떠난다. 이번 여행의 목표는 일일 삼만 보. 평소보다 조금 무리하게 세운 계획이다.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은 이유가 있는 법


3시간 가량을 달려 화개 터미널에 도착했다. 노래 가사 속에만 존재했던 화개장터에서 쑥떡도 사고, 보리수 열매도 맛보고, 흘러가는 섬진강 물줄기를 눈으로 따라가 보기도 한다.


아, 우리가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이 있다. 서울의 한강 공원을 생각했던 터라 강가를 걸을 수 있는 길이 잘 조성되어 있을 줄 알았는데, 현실은 차가 쌩쌩 다니는 대로변을 아슬아슬 지나가야만 했다. 하동을 검색하면 늘 SNS 피드 상단에 빠지지 않던 유명 재첩국수 맛집을 꼭 찾아가겠다고 터미널에서부터 그 위험천만한 길을 한 줄로 나란히 걸었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다.

남들이 했던 여행을 좇아가고 싶진 않았지만, 먹는 것에서만큼은 달랐다. 빅데이터가 증명해주는 여행객들의 동일한 레퍼런스에는 무슨 이유가 있지 않을까.


재첩국수와 메밀전병


힘겹게 찾아가 40분 가량을 기다린 후 맛본 재첩국수는 지극히 평범한 맛이었다. 그래도 섬진강이 한눈에 보이는 탁 트인 경치가 아쉬움을 달래주었다. 여긴 뷰 맛집이다.



하동의 윤중로, 십리벚꽃길


지난 여행들을 돌이켜봤을 때, 여행지의 명소는 택시 기사님을 통해 듣는 정보가 가장 정확했다. 마침 강 건너편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고, 여행의 큰 그림을 완성하는 데 도움이 될까 싶어 택시를 탔다. 걷기 여행을 한다는 우리 말을 가만히 들으시더니 십리벚꽃길을 소개해주셨다. 벚꽃이 한창 만개하는 4월에는 밤에도 사람들이 북적거리고, 사랑하는 청춘남녀가 손을 꼭 잡고 걸으면 백년해로한다는 그 길. 적당한 곳에 택시를 세워 내리막길을 따라 걸었다.


십리벚꽃길


보도블록은 두 사람이 걷기에는 조금 부족해서 서로의 어깨를 맞닿은 채 딱 붙어 걸어야만 했다. 그래도 좀 전 재첩국숫집을 찾아 나설 때와 달리 옆에 나란히 걸으며 수다도 떨 수 있으니 많이 나아진 환경이다. 양 옆으로 끝없이 늘어져있는 나무들은 모두 벚나무였다. 바람에 꽃잎들이 하나하나 흩뿌려져 내리는 이 곳의 또 다른 계절을 상상하며 길의 초입부에 들어섰다.



조금 쉬고 싶던 찰나에 예쁜 카페를 발견했다. 하동에 온 만큼 하루에 꼭 차 한 잔은 마시고 싶어 수제 오미자차를 주문했다. 어느 곳에 시선을 놓아도 아깝지 않은 자리에 마주 앉아 K는 일기를 쓰고, 나는 가져온 책을 읽었다. 일상적인 일들을 낯선 곳에서 색다른 기분으로 한다는 것, 여행의 이런 점들이 좋았다.



숙소를 껴안은 차밭과 섬진강


이번 여행이 좋았던 수많은 이유 중 8할은 숙소 때문이었다. 의외로 하동에는 인기 있는 숙소들이 정말 많은데, 우리도 그곳들 중 한 군데에서 머무르고 싶었다.


5월 말, 6월 초는 하동 여행의 최적기여서인지 후보로 찜해두었던 대부분의 숙소는 예약이 완료된 상태였다. 남아있는 몇몇 곳은 차 없이 가는 우리에겐 적합하지 않았다. 남은 선택지들을 과감히 포기하고 화개장터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한 게스트하우스를 발견했다. 옆에는 푸릇한 차밭이 있고, ‘섬진연가’라고 이름 붙여진 방의 테라스로 나가면 눈 앞에서 섬진강을 만날 수 있다. 보고 싶을 때마다 눈에 담을 수 있는 자연경관이 숙소를 껴안고 있다는 점이 꽤나 매력적이었다. 무엇보다 우리 같은 뚜벅이 여행자들은 무료 픽업도 가능했다.


게스트하우스의 공용 공간


숙소는 사진으로 볼 때보다 훨씬 더 근사했다. 한쪽 벽면이 책들로 꽉꽉 들어차 있는 숙박객들의 공용 공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숙소 내부와 한 켠에 놓인 CD플레이어, 벽면에 일렬로 죽 세워진 CD와 수록곡들. 매일 아침 그 앞을 서성이며 어떤 노래를 들을까 고민하는 시간도 여행의 일부로 만들어준 사장님의 세심함이 돋보였다.


숙소 투어를 마치고, 조금 생뚱맞게 배달음식을 시켜먹었다. 샤워하고 맥주 한 캔 따니 8시 남짓 되었을까. 보통 저녁을 먹고 적당한 알코올이 들어가서 기분이 좋아질 즈음 숙소에 들어왔었던 지난 여행과 다르게, 일찍 마무리하는 여정이 아쉽지 않았다. 느슨한 일정 속에서 가질 수 있는 여유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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