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촌, 향도 (17)
누나가 나에게 책 한 권을 건넸다. 언뜻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디자인이 (나 개인적으로는 조증과 울증을 표현한 거라 본다) 눈길을 끄는 책, 『삐삐 언니는 조울의 사막을 건넜어』. 사실 나의 질환 명이 무엇인지는 물음표이다. 첫 6개월 동안 있었던 Y정신건강의학과 의원에서는 내가 불안장애와 함께 조울증을 가지고 있다고 진단했으며 현재 다니는 R정신건강의학과 의원에서는 내 기억에 행동장애와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물론 불안이 동반된. 나는 주변에 나를 이야기할 때 그냥 조울증이라 말한다. 여러 행동적 문제나 인격적 문제가 있지만 그걸 모두 포괄하여 설명하기란 나로서도 어려운 일이고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정서적 문제라 할 수 있는 '조울증'으로 나를 표현한다.
나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동시에 가장 많이 마찰을 빚는 사람은 누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함께 사는 동시에 파산한 나의 경제적 후원자이기도 하기 때문에. 그런 누나가 준 책을 나는 다른 읽어야 하는 책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읽지 않으면 안 되었다. 누나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기도 하고 내가 나의 질병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기 때문이다.
책은 서울대를 나와 한겨레신문에서 활동 중인 이주현 기자가 몇 년 간의 길고 긴 조울과 잘 지내기 위한 사투를 보여준다. 처음 가족들에게 이끌려 폐쇄 병동에 처음 입원했으며 몇 번의 재발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을 지나 이제는 조울과 함께 잘 살아보려 하는 지극히 사적인 노력이 들어있다.
저자는 자신의 조울증의 계기를 여러 과거로부터 통찰하려 하지만 딱히 공감 가진 않았다. 원래 조울증이라는 게 마치 신체적 질병과 같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공감할 이유도 없긴 하다. 내가 주목한 것은 조울증의 파고 속에서도 멈추지 않고 직장 일을 계속 병행해나갔다는 점이다. 그것이 바로 여성의 '깡'인 것이다. 나는 매일을 실패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도망가려 할 때 저자는 꿋꿋이 자신의 직업을 지켜나갔던 것이다. 나 역시도 나의 직업을 지켜가려는 노력이 좀 더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가지 내 마음에 와 닿았던 부분도 있어 기록해 둔다.
인간에게 생각, 마음, 영혼이 있다면 가장 바꾸기 쉬운 것은 생각이다. 마음을 흙, 생각을 물, 영혼을 식물에 비유해보자. 식물의 종을 아예 바꾸는 것은 불가능하고 토양을 바꾸는 것도 쉽지 않다. 이 중 물 공급이 가장 조절하기 쉽다. 영혼을 교체하는 것도 어렵고 마음을 고쳐먹기도 힘들다. 생각을 바꿔보도록 노력해보자. p. 170
한 가지 목표에 올인하지 말고 여러 가지 목표를 세워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더 안전하다. 달걀을 여러 바구니에 분산해 놓으면 바구니 한 개가 깨져도 피해가 적다. p. 172
타인이 타인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나의 감정은 내가, 남의 감정은 남만이 온전히 느낄 수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생각하게 되었음. p. 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