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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녕별 May 02. 2020

어쩜 인생이 꼬여도 이렇게 꼬이나요

코로나가 내 인생에 끼친 나비효과

잠이 오지 않는 밤이다. 그동안 글을 쓰려다 쓰려다, '오늘은 날이 아니다'라는 핑계로 몇 번을 물렀는지 모른다. 그렇게 메모장에 쌓여 간 글감만 열 개가 되어 가고 있다.

요즘은 자꾸만 새벽에 잠이 깬다. 2시, 3시, 5시, 6시. 일정치도 않은 시간에 문득 잠이 깨면 멍청하게 넋을 놓은 채 꼼지락거리거나 창밖에 들려오는 새 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이런 도시에서도 새벽에 새들은 우는구나. 그런 당연한 생각을 하면서.




일을 그만둔 이후로 워킹 홀리데이를 준비하고 있었다. 어차피 오래전부터 첫 직장을 그만두면 워홀을 가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터라 그 시기가 조금 앞당겨진 것뿐이라고 생각했다. 새해가 밝자마자 영어 회화 학원을 끊었고, 스피킹 연습에 좋은 책들을 몇 권 샀다. 비자 신청일은 5월 중순. 그전까지 열심히 학원에 다니며 영어를 배우다가 6~7월에 만기 되는 적금과 곗돈을 들고 뉴질랜드로 떠날 예정이었다. 그 돈이면 부자처럼은 아니더라도 웬만큼 걱정 없이 초기에 자리를 잡을 수 있을 정도는 됐다.

계획상으론 정말 완벽했다. 5월 비자 신청, 그 직후 곗돈과 적금 만기, 돈을 들고 초여름에 떠나 내년 초여름에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면 나이는 스물아홉, 그러니 서른 전에 다시 취업할 수 있다. 지금 생각해도 어쩜 이렇게 계획이 완벽한지! 하지만 완벽한 계획만큼이나 죽여주게 완벽한 타이밍에 터지고 말았다. 코로나가.


코로나가 나라를 휩쓸기 시작한 후, 모처럼 재미를 붙인 운동은 겨우  달을 하고  달을 내리 쉬었다. 일을 그만두며 예매해뒀던 항공권도 결항, 힘들 때면 에너지를 얻곤 했던 사랑하는 밴드들의 공연도 전부 취소, 마음 놓고 카페도 못 가는 날들의 연속! 그 와중에도 나는 어찌나 멍청했는지, 워홀에 대한 희망만큼은 버리지 못한 채였다. 괜찮을 거야, 괜찮겠지, 설마 워홀까지 꼬이겠어, 애타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날로 악화되는 시국을 보며 설마설마했는데... 결국 지난 4월 중순쯤 뉴질랜드 이민성에 공지가 올라왔다.


'모든 국가의 워킹 홀리데이 비자 연기'


올 것이 왔구나 싶었다. 그간 애써 모른 척하던 나의 안일함이, 괜찮을 거라는 자기최면이 비수가 되어 돌아온 순간이었다.

6개월 이내에 다시 신청을 받는다는데, 그러면 나는 올해를 그냥 날리는 거야? 게다가 그렇게 간다고 해도 다시 돌아오면 특별한 경력도 없이 서른이 되어 있는 거고? 가을에 2차 대유행 어쩌고 하던데, 그럼 더 밀릴 가능성도 있는 거잖아?

이젠 더 이상 억누를 수도 없는 생각들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공지를 본 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열흘을 흘려보냈다. 열흘이나! 포기해야 한다는 걸 알지만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꾸역꾸역 영어 공부를 한답시고 붙잡아 온 지난 넉 달이 아무것도 아닌 게 되어 버리는 걸 견딜 수 없었다. 나는 아무것도 해보지 못했는데 다시 직장인이 되어야 한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고집을 부려 봤자 무얼 하나. 이젠 철없는 고집을 접어야 할 때였다.


착잡한 마음으로 2년 만에 구직 사이트에 접속해 골라낸 공고도 겨우 세 개. 하기야 이 시국에 공고가 올라와 봤자 얼마나 올라오겠는가. 첫 취업 당시의 이력서에 1년 8개월짜리 경력을 추가해 넣고 지원 버튼을 눌렀다. 그렇게 다시 지겨운 면접을 보러 갔던 날, 아침부터 이루 말할 수 없는 우울감에 휩싸였다. 차라리 놀기라도 실컷 놀걸. 아니다, 어차피 여행도 못 가는 상황이었지.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껏 준비해 온 일을 자의가 아닌 이유로 포기해야만 한다는 것에 무척이나 속이 쓰렸다. 어쩌면 내 인생에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를 이렇게 날려야만 한다는 것에 억울함이 복받쳤다. 어디서부터 일이 꼬인 건지 시간을 더듬다 보면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다른 방도가 없는걸. 포기할 땐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 여기서 더 시간을 날릴 순 없다.

어린 애처럼 떼를 쓰고 싶은 마음, 어른스러운 척 받아들이려는 마음, 두 가지 마음이 한데 얽혀 온종일 속을 긁었다.




"내 인생? 아주 순조롭게 꼬이고 있지."

요 몇 달, 누군가가 근황을 물어보면 자조를 섞어 답하던 말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직 저런 농담이 나온다는 것이다. 농담도 나오지 않을 만큼 괴로운 삶을 아직은 겪지 않았다. 그래, 아직은 살 만하다는 증거다.

어쩌면 오늘을 위해 한 달 전 그 책을 읽었던 건가. 왠지 모르게 마음에 남아 버린 문장들이 담긴 그 책.


농담이 우리를 살게 하지.
우리는 익살을 사랑해.

우리의 삶엔 익살이 필요하다.
우리는 가끔, 삶을 좀 우습게 볼 필요가 있다.


내 인생, 나한테나 비극이지 멀리서 보면 조금 웃기긴 하다. 일 그만두자마자 전세계적인 전염병이요? 그래서 멍청하니 상반기를 날리고 다시 취업 준비요? 하하, 그것참 재미없는 시트콤 같군요.


그래서 어느 때보다도 농담이 필요한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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