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겨우 뭔가를 알기 시작했던 나이에 나는 엄마 손에 이끌려 성당의 높은 층고 아래잘생겼지만 십자가 못 박힌 헐벗은 예수님과 그의 모친 성모 마리아 앞에 섰다.
매주 다가오는 고해성사와 그 이벤트를 위해 억지로 꾸며댄 죄, 그에 대한 벌로 받는 기도 암송이 그렇게 억지스러울 수가 없었다. 마치 모두가 거짓인 줄 알면서도 하는 연극 같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정식 교리를 배우는 과정에서 수녀님들이 부잣집 아이들에 대해 편애하는 것을 보며 천국이라고 알려주는 이야기들에 대해 남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신은 무슨. 순 거짓말!'
그래서 기도를 외우지 못했다고 맞는 손바닥 매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소위 미션 스쿨이라는 중학교를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갔다. 매주 있는 성경 시간마다 교목 선생에게 따지고 대들었다.
왜 정해준 교회에 가서 출석 도장을 받지 않으면 성경 과목 점수의 반을 주지 않는지에 대해, 왜 착한 사람이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천국에 가지 못한다고 말하는지에 대해 바득바득 대들었다. 말이 안 되는 논리라고 생각했다.
매년 상하반기 부흥회 기간이 되면 큰 강당에 전교생을 모아놓고 간증 시간을가졌는데 시간마다 자기 죄를 뉘우치며 울부짖는 아이들을 나는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창피하지도 않나 봐..'
내게는 죄책감에 그 자리를 견딜 수 없어서 솟구치듯 일어서서 울어대는 그들이, 많은 아이들 앞인데도 불구하고 부끄러움도 모르는 뻔뻔한 거짓말쟁이로 보였다.
가을날 대학 교정에서 나를 압도하던 아름드리 은행나무 밑에서 하염없이 그 노란색을 즐기고 있을 때 지금 회개하고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이마에 666이 찍혀서 지옥에 떨어진다는 협박을 받았다.
"그래? 냅둬요. 난 그냥 이마에 666 찍고 지옥에 떨어져서 악마들이랑 싸울 테니"
내 인생을 관통하는 기독교의 출현 모습은 아쉽게도 다 이런 식이었다.
그러다 절을 가게 되었다.
어느 날 문득 혼자 슬리퍼를 끌고 아무 준비도 없이 내처 전라도 땅끝에 대웅전 일몰이 기가 막히다는 절에를 가게 되었다.
한 여름 7월 뜨거운 낮에 지나는 강아지 한 마리 없던 그 흙길을 버스에서 내려 30분이나 걸었을까 싶을 때 대웅전이 눈에 들어왔다.
그냥 오늘은 무조건 여기서 못 나간다는 생각에서 주지 스님을 찾아 하루 재워달라고 했다.스님의 첫 반응은
"안돼요!"
였다. 그때까지 절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안 붙잡는 곳이며 지나는 객이 하루를 청해도 기꺼이 밥과 방을 내준다고 알고 있던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안되면 안 돼요. 여기서 안 재워주시면 갈 데가 없어요"
평소 나답지 않은 막무가내의 떼를 부렸다. 그러면서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여기서 쫓겨나면 그다음 어떻게 할 것인지 머릿속으로 빠르게 계산했다.
그런데 나보다 더 멍한 표정이던 스님이 한동안 입을 떼지 못하더니 또 예상치 못한 반응을 보였다.
"그래요? 그럼 일루 와보세요"
하더니 내 앞을 지나혼자 성큼성큼 종무소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단호하게 안된다고 할 때는 언제고, 어차피 받아줄 거면 그렇게 모질게 대답은 왜 했을까 의아해하며 뒤 따르는데 스님의 행색이 눈에 들어왔다. 반팔 흰 티에 까만색 가죽 허리띠로 졸라맨 승복 바지에 흙 묻은 운동화는 내 상식에선 별난 스님의 모습이었다.
'땡중인가..?'
고승 땡중 가릴 처지가 아니라서 일단 그날을 시작으로 일주일을 절에서 지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내게 돈을 요구하는 대신 스님은 절의 온갖 잡일을 시켰으니까. 내가 수건이며 씻을 도구 일체를 무상으로 요구한 건 덤이다.
한참이 지나고 스님과 좀 친해진 후에서야 그날 내가 어떻게 보였으며 왜 재워줬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가라고 해도 안 갈 것 같아서 재워줬다"
고 한다. 살면서 한 번씩 평소와 동떨어진 모습일때가 생기는데 그때의 내가 바로 그럴 때 아니었나 싶다. 그것도 내심 종교에 대한 어떤 믿음 같은 것이 없었다면 그렇게 막무가내로 나를 의탁할 생각이나 했을까 싶다.
이후 나를 받아준 것이 고맙기도 하고 마음의 의지가 되기도 하는 것 같아 제대로 불교인이 돼 보려고 입문을 해봤다. 명상도 하고 불교의 세계관과 철학을 열독 하기도 했으며 스님과 되지도 않을 염화미소의 차담도 해봤지만 결국 나는 수계식도, 법명도 받기를 거부하고 도망치고 말았다.
도대체 벽 보고 도 닦아서 어디 쓰시려고 하냐는 내 도발에
"그냥 그렇게 사는 것이 좋아서"
라는 말로 훨씬 스님들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는 나로서는 그렇다면 나는 나대로 좋아하는 방식대로 살아가면 되겠구나 위안받았다.
나는 지금도 거룩하고 엄숙한 분위기의 성당의 찬송가 듣기를 좋아한다. 동시에 새벽의 조각달과 별빛 아래서 듣는 절집의 불경 소리도 좋아한다.
나를 속박하지 않는 거리두기를 하며 가끔 마음의 평화를 찾기 위해 하느님도 불러보고 내 안의 부처도 소환해본다.
아이러니하게도 사후 세계관을 가진 기독교로부터는 수도승이 보여주는 정제된 현생의 생활양식을, 윤회의 세계관을 가진 불교로부터는 내일은 없이 오늘을 남김없이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그러면서 오늘도 내 옆구리를 묵직하게 누르며 돌아누운 5년 차 고양이의 꼬리 쭙쭙이를 보며 혀를 끌끌 찬다.
'차~암 너도, 그렇게 어미한테 충족하지 못한 욕구가 남아서야 어디 제대로 해탈이 되겠니? 넌 내생에도 딱 고양이로 환생하겠구나.. 불쌍한 것..'
본능에 충실하다는 동물도 저런데 하물며 인간은 더더욱 못 다 이룬 꿈, 애욕에 가슴 아파하는 것이야 당연하겠지 하는 생각에 이른 봄날 감상이 아지랑이 피듯 펴 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