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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코니 Mar 10. 2022

잠들기 전에 읽는 백일야화(百日夜話)

첫 번째 밤 - 그림자 사서(1) 



로날드 사장은 풍성하고 굽슬굽슬한 은발을 자랑하는 신사였다. 


그는 귀밑까지 닿는 머리를 토끼 꽁지처럼 뒤통수에 붙여 묶고 짙은 남색의 헌팅 캡을 쓰고 다녔다. 모자 색은 은발과 절묘하게 어울렸는데, 나이 지긋한 신사의 뛰어난 지성과 인품을 표현하기에 적합한 색 배합이었다. 


로날드 사장은 단풍 든 오동잎 빛깔의 콤비와 회색 코르덴 바지를 즐겨 입었다. 그의 코에는 작지만 깔끔한 은테 안경이 걸려 있었다. 구두는 물론 반짝반짝 윤이 났다. 로날드 사장 손에는 항상 책이 들려 있었는데 그것은 당연한 모습이었다. 그는 작지만 알찬 출판사를 운영했다. 부지런한 사장은 모든 원고를 손수 검토했다.  


로날드 사장은 무엇보다 책을 사랑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고 세상이 변했다. 사람들은 이제 종이로 묶은 책 보다 허공에 뜬 마법에 더 빠져들었다. 상상의 세계는 종이책 독자의 머릿속에서 펼쳐지지 않았다. 무수한 빛그림을 부를 수 있는 마법 주문만 외면 곧바로 환상 그림이 떠올랐다.  시간이 갈수록 책 읽는 사람의 수가 줄어들었다. 점점 책이 팔리지 않았다. 


로날드 사장은 매일 퇴근 시간에 회사 건물 뒤뜰에 있는 창고에 들렸다. 독자가 읽어주기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책들이 천장까지 높다랗게 들어차 있었다. 

“책이란 모름지기 누군가의 손에 들려 한 장 한 장 넘겨질 때 생명을 얻는 법인데.”

로날드 사장은 책을 한 권 뽑아 들었다.  먼지가 앉은 책은 변심한 연인을 기다리는 이처럼 처량해 보였다.

사장은 속말로 중얼거렸다. 

“내가 만든 책이니 나라도 읽어줘야겠지.”


그는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 안에는 눈에 익을 대로 익은 문장이 가득했다. 그가 꼼꼼히 교정, 교열을 본 책이었다. 그는 곧 책에 쓰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팔아야 할 상품으로 만들 때에는 느끼지 못한 즐거움이 그를 찾아왔다. 

바로 독서의 행복이었다. (계속)


로날드 사장은 자신이 만든 책을 읽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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