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맨아래접시 Oct 17. 2023

이사준비 2

냉장고 이야기 2

집에 도착하니 가지런히 놓인 낯선 신발이 보였다.

먼저 집에 도착한 둘째 녀석이 소파에 앉아있고 주방 쪽 냉장고 옆에 낯선 이가 보인다. 오후 출근 전에 남편이 AS 신청을 해뒀다고 했는데 서비스 기사님인가 보다. 냉장고 뒤를 보던 기사님이 말씀하셨다.

"부품 교체는 30만 원 정도 드는데 이만큼 쓰셨으면 이제 사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원하던 답이 나오고 공식적인 냉장고의 사망선고가 내려지는 순간이었다.


며칠은 냉기가 지속될 수 있으니 냉장고 문을 최소한으로 열라는 기사님의 당부가 이어졌다. 곧 기사님이 가고 전원 창이 꺼진 냉장고를 봤다. 습관적으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불 꺼진 생기 없는 냉장실에서 낯선 냉장고 냄새가 났다. 이어 냉동실 문을 열었다. 희미한 냉동실 불빛을 뒤로한 꽉꽉 채워진 냉동실이었다. 제일 먼저 보이는 검은 봉지를 손으로 집었다. 아직은 단단하게 잡히지만 이전보다 덜 단단한 것 같은 촉감이 느껴졌다. 며칠 전부터 이미 냉장고의 기능을 상실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그냥 냉동실 문을 닫고 잠이 들었다간 내일 아침에 녹아내리는 냉장고를 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바로 냉동실에 있는 물건들을 꺼내서 정리했다. 생각보다 별로 많지도 않네. 나름 틈틈이 정리하고 파먹은 효과인가. 스스로를 칭찬하며 냉동실에 있던 물건들을 열심히 덜어내자 점점 냉동실이 밝아졌다. 냉동실이 이렇게나 밝았나. 늘 침침했던 공간이었는데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켜켜이 쌓아놓은 음식과 저장용기에 가려져 빛을 발하지 못하던 냉동실 등이 사망선고가 내려진 후에야 제 기능을 발하고 있었다. 오래전에 사놓은 순살 갈치가 포장을 한 번도 뜯지 않은 채로 나왔다. 잊고 있던 갈치. 좋아하는데 먹지도 못하고 잊힌 갈치는 이미 1년이나 지난 유통기한을 새긴 비닐 옷을 입고 있었다. 며칠 전에 화채 해 먹으려고 사둔 냉동 과일은 곧바로 아이스 박스에 넣었다. 아직 2~3일 밖에 되지 않은 것이었다. 당장 버릴 음식과 보관이 가능한 먹을 음식을 구분해서 정리했다. 정리하는 동안 냉동 핫도그 몇 개를 재빠르게 전자레인지에 돌려 둘째 녀석 입에 넣어주었다. 관심받지 못하고 오랫동안 냉동실 한편에 자리하고 있던 핫도그였다. 둘째는 본능적으로 오늘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리고는 최대한 협조하겠다는 태도로 열심히 먹어보겠노라고 했다. 둘째의 적극적인 태도에 힘을 얻은 나는 곧이어 아이들이 좋아해서 쌀 때 쟁여둔 냉동 피자 1판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이미 흐물 해진 냉동만두는 찜기에 앉혔다. 늦게 귀가한 첫째는 배가 고팠는지 피자 1판과 만두 1판을 금세 클리어했다. 오늘 저녁은 탄수화물 파티다!! 냉동식품으로 저녁을 때워보자!! 맘 편하게 냉동식품을 애들한테 줘도 된다고 생각하니 마음은 더 홀가분해졌다.


냉장고 상태를 보려고 앞으로 당겨진 냉장고 뒤가 보였다. 7년 동안 볼 수 없었던 냉장고 뒤를 보니 생각보다 별거 없네. 덩치 큰 냉장고 몸에서 나온 콘센트가 벽에  있었다. 그동안 냉장고 발을 묶어놨던 사슬을 끊어내는 기분으로 냉장고 콘센트를 뽑았다. 유일하게 불이 들어와 있던 냉동실 불이 꺼졌다. 저녁준비는 수월했지만 냉장고 정리에 녹초가 되었다.

작가의 이전글 이사준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