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공식 4
"아기가 거꾸로 있습니다."
거꾸로 있던 아기가 제자리로 돌아올 수 있다는 돌팔이 의사의 말을 믿고,
몇 시간 진통을 겪은 후, 지친 산모와 뱃속 아기, 의사, 간호사까지도 모두 잠들어버렸다가
아이가 태변을 먹고 죽었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응급 제왕절개 수술로 태어났단다.
이런 나의 탄생 설화는 마치 박혁거세나 주몽의 탄생 설화처럼 그렇게 옛날 옛적이야기로만 엄마의 입에서 전해내려왔다. 이제 탄생 설화는 더이상 가늠할 수 없는 옛날 이야기가 아니다. 한 인간의 출산을 직접 겪은 여자가 또 다른 한 여자의 고통을 어렴풋이 아는 정도에 이르렀다.
이제 '엄마'는 단순히 '엄마'라기 보다는 출산의 고통을 나눈 동지이기도 했다.
"엄마, 나도 어릴 때 그랬어?"
요즘 내 아이를 키우면서 엄마에게 자주 하는 질문이다.
이렇게나 힘든 육아를 어찌 했나,
나도 그렇게 엄마를 힘들게 한 아이였나, 의구심이 들어 자꾸 물어보게 되는 것 같다.
당연히 육아는 기쁜만큼 힘든 것이건만
나만 겪는 게 아니라는 확인을 또 하고 나서야
'엄마는 외할머니도 일찍 돌아가셔서 친정엄마도 안계셨는데 이 보다 많은 일을 어떻게 해냈나', 티는 못내고 속으로 생각을 삼킨다.
엄마의 잔소리가 아직도 싫지만 예전처럼 싫기만 할 수 없는 이유는 아마도 이 이유에서일까.
"꼭 해야만 하는 일들을 할 뿐인데도 여성들은 남편에게는 따분한 아내, 자녀에게는 귀찮은 존재가 되는 경우가 많다.
끊임없이 자질구레한 일에 신경을 쓰는 것이 몸에 배어 쩨쩨하고 까다롭게 굴게 된다.
이 여성이 겪어야 하는 부당한 대접 중에 가장 치명적인 것은, 가족들 옆에서 충실하게 의무를 수행한 대가로 가족의 사랑을 잃게 되는 것이다."
- 버렌트 러셀의 <행복의 정복>, 중-
누구는 우아하고 교양있게 살고 싶지 않느냐.
물건 좀 제자리에 두라고,
왜 바로 앞에 있는 걸 못찾냐고,
옷이며 운동화며 더럽게 신냐고,(등등)와 같은
듣기 싫은 소리를 해대며 그 티도 안나고 잡다한 일에 시간을 쓰고 싶겠느냐고.
나도 입은 옷 휙 던져놓고, 공부하고, 책 읽으면,
깨끗한 옷이며 신발을 대령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얼마나 말하고 싶었을까.
엄마 편을 든다고 서운해하는 아빠를 보며
내가 남자였으면 또 달랐을까 싶지만
여자이기에 엄마의 인생을 이해해간다는 게 슬프다.
그만큼 나도 그 짐을 지어가고 있다는 말이니까.
평생 엄마를 이해하고 싶지 않다는 이기적인 생각도 든다.
엄마보다 편한 삶을 살고 싶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