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살기 시작한 지 반 년쯤 지났을때였다. 막연하게 습관적으로 하던 영어 인풋을 전략적으로 가져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뉴욕에 살게되었으니 뉴욕 배경인 영화, 드라마를 보거나, 고전이라 말하는 영어 원서 해리포터를 읽어보고 있었다. 당시 Suits (슈츠)라는 법정 드라마에 빠져있었는데, 종종 몰랐던 표현들이 나와서 알아가는 재미가 있었지만 일상으로 돌아오면 또 다시 꿀먹은 벙어리였다. 해리포터를 읽어보고 있었지만 사실 영화도 안본 나였고, 소설을 좋아하지 않기도 하였기에 해리포터를 영어로 읽는다고 내 미국일상의 삶의 질이 나아지는 건 없었다. 그저 영어로 무언가를 인풋했다는 뿌듯함 뿐. 일상을 조금 더 재밌게 살아가기엔, 즉 누군가와 연결되는 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질 않았다.
사실 내가 한국에서 영어를 해야하는 상황은 반복되는업무상황을 제외하고는 영어를 일상에서 사용할 일이 극히 제한적이었다. 영어로 인한 답답함을 느낀적은 딱히 없었다. 업무 상황의 80%는 영어로 이메일을 작성했던 것이고, 한 달에 한 두번 해야했던 미팅상황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형식적인, 기능적인 대화만 잘 준비하면 됐었다.
아무리 집에서 남편과 한국말만 한다지만 미국에 살게되니 어쩔 수 없이 영어로 소통을 해야할 일들이 생긴다. 병원 예약할 때, 엘리베이터에서 누가 말 걸 때, 공공기관에서 업무처리를 해야할 때 등의 일들이다. 그 중에서도 명확한 목적이 있는 소소한 행정 업무들은 회사에서처럼 ‘목적' 달성을 위한 "기능"적인 영어만 잘 준비하면 되었다. 문제는 내가 이곳에서 패션회사의 세일즈로 취업을 하게되면서 시작되었다.
업무 관련된 의사소통은 한국에서 해왔던 것처럼 대부분 이메일로 진행이 되었고, 미팅도 목적만 달성하면 되는거였다. 옷을 파는 업무였으니, 옷에 대해서 잘 설명을 하고, 매출을 설명하고, 다음 옷은 어떤 옷을 진행하면 되겠다는 설명을 하면 되었다. 즉 업무영어는 잘 '설명'을 하면 되는데 문제는 목적없는 스몰토크가 필요한 상황들이었다. MBTI에서가뜩이나 극 I 성향을 지닌 내가 견딜 수 없는 상황들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특히 매주 월요일과 금요일이 제일 지옥같았다. 매주 월요일의 질문 "How was your weekend?" (주말 어떻게 보냈어?)와 금요일의 질문 "Any plan for the weekend?"(주말에 뭐해?)은 그저 매주 Nothing special 이라고만 하기에 어느 순간부터 내가 생각해도 성의가 없어보였다. 아니 어쩜 다들 그 질문 하나에 그렇게도 세세하게 자기 이야기를 한담?
너무나 신기했다. 굳이?? 이런것까지 내가 알아야 하나? 라는 생각이 항상 머릿속을 맴돌았고, 입은 억지로 웃으며 이야기를 듣고 있지만 입가엔 경련이 일기 시작하고 머릿속은 뭐라고 반응을 해야하지? 나는 뭐라고 말하지? 라는 생각으로 가득차거나 머릿속이 하얘지곤 했다.
하루는 정말 이건 안되겠다 싶어서 주말에 근교 여행을 갈거라고 말해버렸다. 사실 아무 계획도 없었는데 말이다. 역시나 That sounds cool!! Let me know how it goes! (와! 좋은데! 다녀와서 어땠는지 알려줘!) 라고 한다.
아뿔싸. 아니 나는 왜 여행을 가겠다고 한거지? 어쩔 수 없이 그 주말에 여행을 다녀왔다. 이왕 가기로 한거 월요일에 스토리를 말하기 위한 주말을 보냈다. 내가 가겠다고 한 여행지를 검색해서 사람들이 가장 리뷰를 많이 단 곳을 중심으로 여행 계획을 짰다. 이유는 리뷰를 보면서 대화에 활용해야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여행하는 내내 이건 이렇게 말해야겠다, 저건 저렇게 말해야겠다. 생각하면서 다니고 다녀와서 리뷰를 보며 내가 느낀걸 표현한 사람들이 있는지 구글 지도 리뷰, 유튜브 Vlog 리뷰 그리고 댓글까지 꼼꼼하게 리서치?를 하였다.
취업 면접 준비도 아니고, "주말에 뭐했어?" 이 질문 하나에 제.대.로 대답해보겠다고 마치 엄청난 프로젝트를 하듯 공부를 했더랬다. 그런데 신기한건 한 두번 이렇게 빡쎄게 공부를 하다보니 일상이 재밌어지고, 일상이 영어로 자연스럽게 표현되기 시작했다.
이민 초반 습관적으로 미드를 보고, 해리포터를 읽을 때와는 달리 일상에 도움이 되는 영어공부가 시작된 것이다.
업무를 위한 영어를 하듯이 일상에 목적을 부여하니 같은 양의 인풋을 하더라도 체화되는 정도가 달랐다. 그리고 너무 재밌었다. 마치 슈퍼마리오와 같은 RPG 게임에서 레벨을 깨는 듯한 느낌이랄까?
물론 내가 원하는 맥락의 영어 콘텐츠를 찾는데에 시간이 오래걸리기는 한다. 하지만 그 시간 마저도 즐길 수 있게되었고, 심지어 지옥같이 느껴지던 월요일과 금요일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