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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록소록 Jul 28. 2023

아름다움을 아는 죄

영화 <수라>

 

 비가 무섭게 내렸다. 이번 해엔 장마가 더 길고 강렬하다. 자연의 위력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어느새 마음은 비 내리는 숲속을 향한다. 비에 잠긴 숲은 한층  활기가 더해져 그야말로 원시적 자연의 생명력을 느끼게 한다. 어두워지는 사위와는 다르게 초록 잎은 더욱 생기있게 깊은 빛을 드러내고 흙 속에 기어든 이름 모를 벌레들은 숨죽인 채 습기를 만끽한다. 축축한 흙냄새와 나뭇잎을 후드득 치는 경쾌한 소리를 느끼고 싶다. 비 오는 산을 올라본 이라면 아름다운 숲속의 생명력을 기억할 것이다. 소중한 기억이 숲을 다시 찾게 하고 지켜주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영화 <수라>는 알지 못한 세계의 또 다른 아름다움으로 안내했다. 한 마리의 검은 머리 갈매기가 되어 하늘을 비상한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서해안 갯벌과 바다의 모습은 고요하고도 분주한 생명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생명체의 움직임에 따라 거대한 물결무늬 그림이 갯벌을 뒤덮고 있고 그 위로 다양한 새들이 떼를 지어 춤을 춘다. 좀 더 낮게 날아 갯벌에 다가가면 부드러운 파도의 물결이 갯벌 생명체들을 보듬으며 생명력을 북돋아 주고 있다. 이 모든 것의 움직임이 정교한 시계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을 해내는 하나의 신비로운 생명체처럼 느껴진다. 자연의 위대함이다. 보잘것없는 인간의 이기가 자연에 탐욕의 눈길을 던진다면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이 될 것이다.


 영화<수라>의 황윤 감독은 아름다운 서해 갯벌이 새만금 간척사업으로 인해서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담담히 카메라로 그려낸다. 2006년 간척 사업 반대 운동과 소송에도 불구하고 서해안 갯벌이 시멘트로 뒤덮이는 것을 목격한 후 암담한 마음으로 군산을 떠났다. 2014년 다시 군산으로 이주해 오면서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던 땅에서 여전히 갯벌을 보존하기 위해 조사하고 운동하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새만금 방조제 건설이 한창 진행된 후, 유일하게 남아있는 갯벌 수라에는 놀랍게도 저어새가 날아들고 갯벌의 생명체들이 힘겹게 생존하고 있었다. 


 <새만금 생태 조사단>이라고 하는 시민 단체는 어떤 대가도 없이 오로지 잊혀가는 갯벌 생태를 보존하기 위해 이십 년이 넘도록 그곳 생명체들을 기록하고 사진 찍어 보존하는 일을 해 오고 있다. 그들이 기억하는 삼십 년 전 갯벌의 생태는 보지 못한 우리에겐 상상력을 동원해야 그려볼 수 있는 그림이다. 황윤 감독이 인터뷰한 오동필씨는 그 시절의 아름다운 갯벌을 또렷하게 마음에 품고 살아간다. 수만 마리의 도요새들이 날아와 갯벌에 앉았다가 함께 우르르 날아가며 내던 거대한 바람 소리와 아름다운 날갯짓을 묘사한다. 그때의 기억을 파노라마처럼 재현하며 이야기하는 그의 눈빛은 듣는 이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그 시절 갯벌의 생명체들이 얼마나 생기발랄한 움직임을 보였는지 그 생명체들과 마을 주민들이 얼마나 자연의 일부처럼 공존하며 살아갔는지를 담담하게 이야기했다. 


 도요새들은 먼 뉴질랜드에서 겨울을 보낸 후 서해안 갯벌로 날아온다고 한다. 긴 항해 끝에 서해에 잠시 쉬어 홀쭉해진 배를 갯벌에서 채우고 힘을 비축한다. 다시 추운 툰드라 지역으로 날아가기 전까지 서해안 갯벌은 그들에게 중요한 생명의 서식지가 된다. 수백만 마리의 새들이 몰려와 갯벌을 가득 채우던 새들은 점점 그 숫자가 줄어들고 있다. 검은 머리 갈매기도 봄이 오면 서해로 날아와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우다 찬바람이 불어오면 따뜻한 곳으로 다시 떠난다. 새끼들은 자신이 태어난 곳을 잊지 않고 다시 돌아오는 습성을 가진다고 한다. 다시 돌아온 그들의 고향은 더 이상 그들이 기억하는 갯벌이 아닐 것이다. 새만금 방조제 건설로 갯벌은 거의 사라졌고 그곳에 살던 갯벌 생명체들도 더 이상 바닷물이 흘러 들어오지 않는 영문도 모른 채 하루하루 말라죽어갔다. 인간들의 오만한 결정이 그들의 영토를 모조리 빼앗은 셈이다. 갯벌은 자연 생명체 모두의 영토인데 무지한 인간이 자신만의 것인 양 제 이익을 위해 뻔뻔하게 파헤친 결과다. 


 자연의 아름다움에 전율해 본 사람은 그 마음을 쉬이 잊지 못한다. 황윤 감독이 인터뷰한 오동필씨는 이렇게 말했다. 삼십 년 전 자신이 갯벌에서 너무나도 아름다운 모습을 본 것이 죄라면 그 죄값으로 지금까지 활동을 멈추지 못하는 것 같다고. 멋진 광경을 보지 못했더라면 아마도 자신은 일반 직장을 다니며 평범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을 거라 말하는 그의 눈빛이 슬프다. 그의 손을 잡고 함께 탐사를 다녔던 꼬맹이 아들이 이제 청년이 되어 아버지의 활동 동반자가 되어 있다. 그는 아버지의 노고를 누구보다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을 나의 아버지가 하고 있다고 말하는 아들의 얼굴 표정에서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애틋함이 묻어 나온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은 지금 우리에게 얼마만큼 남아 있을까. 내 아이에게 황홀한 지구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함께 감탄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우리에게 얼마만큼 주어져 있을지 모르겠다. 그 경험이 많을수록 그리고 깊게 감동할수록 우린 지키고자 하는 더 큰 힘을 낼 수 있을 거라 믿는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한 사진작가는 매립을 반대하는 이유를 묻는 이들에게 단 한 번이라도 서해 갯벌을 와 본 적이 있는가를 묻고 싶다고 말한다. 무지와 뻔뻔함이 어리석은 결론으로 이어지고 다시 돌이키기 힘든 재앙을 불러일으킨다. 자연에 도전하여 이득을 취하려는 권력자들의 무모함이 우리 후세와 지구의 생명체에게 던진 이 폐해를 어떻게 책임질 수 있을까.


 기후 위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얼마만큼의 연료를 아껴야 탄소중립을 실천할 수 있는지 어떤 불편함을 감수해야 우리의 지구를 좀 더 지속시킬 수 있을지 방대한 뉴스와 자료가 여기저기서 눈에 띈다. 전문가들이 말하는 수치와 미래 가능성에 대해 나는 잘 알지 못한다. 개발과 자본 중심으로 흘러가는 세상의 힘에 우리의 운동이 어떻게 의미 있는 반향을 일으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나는 여전히 무지하다. 다만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이 땅에서 생명체로 살아가야 할 최소한의 도리를 생각한다. 나와 이웃과 그리고 함께 생존하는 자연이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현재를 보존하며 서로를 지키는 일이 우리의 의무가 아닐까. 생명체들에게 당연하게 있어야 할 바닷물을 뺏지 말 것이고 자유로이 흘러야 할 강을 막지 말 것이며 숲속에서 살아가는 동 식물의 터전을 마구 뚫어대지 않는다면 놀라운 우리의 생명체들은 각자의 영토를 스스로 가꾸는 힘을 가지고 살아가리라 믿는다. 


 지구의 다양한 생명체를 잃은 체로 지구는 존속할 수 없다. 함께가 아니라면 인류도 홀로는 불가능하다. 갯벌에서 목말라하는 비단고둥의 모습이 아른거릴 때, 먹이를 찾지 못해 떠나는 검은 머리 갈매기를 바라볼 때, 흰발농게가 스윽 갯벌 구멍으로 집게발을 내미는 모습이 보기 힘들어질 때 지구의 생명력은 점점 빛을 잃어가는 것이다. 함께 살아가야 하는 것은 인간들만이 아닌 우리 지구 모든 생명체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구를 지키려는 힘이 아름다운 것을 바라보고 감응하는 인간의 본능에서 시작된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지도 모른다. 자연에서의 황홀한 기억을 간직하는 인간다움 속에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더 이상 갯벌에 공항을 지어 인간을 편리하게 만들겠다는 논리를 펴지는 않을 것이다. 


 아들들을 데리고  <수라>영화를 다시 보러 갔다. 어릴 적 아름다운 갯벌의 경험을 함께 하지 못한 미안함과 죄책감도 있었다. 스크린으로 본 서해의 아름다운 갯벌과 새들, 그리고 생명체들이 그들에게도 감동적이었나 보다. 그 아름다움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의 고귀한 마음에 대해서 우린 함께 이야기했다. 아름다움의 힘은 강하다. 경이로운 지구에서 아름다움을 지키고 사는 것만큼 우리에게 더 소중한 것은 없다. 나의 아이들도 그 믿음을 간직하길 소원한다. 도요물떼새의 평화로운 군무가 끊이지 않는 환영처럼 마음에서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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