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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록소록 Mar 27. 2024

형광등이 햇살이 되는 마법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혼자 있는 밤에 케잌을 굽는다. 준비한 재료를 하나씩 꺼내두고 낡은 오븐에 불을 밝힌다. 앞치마를 단단히 여미고 실험을 앞둔 과학도처럼 꼼꼼하게 계량하고 온도를 체크한다. 방해받지 않는 고요한 밤에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에 나오는 빵 장수가 된 것처럼 케잌에 집중한다. 누구에겐가 기쁨과 위로가 될 시간을 떠올리며 경건한 마음이 된다. 오븐이 타닥거리는 소리가 밤의 고요 속으로 스며든다. 마음을 모아 기도하기 좋은 시간이다.



  위로를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제대로 마음을 전하는 일은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서투르다. 기쁜 일에는 함께  활짝 웃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슬픈고 힘든 일에는 함께해 줄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는 듯했다. 위로의 말을 하려고 전화기를 들고서도 적당한 말을 못 찾아 우물거리다 끊는 일이 다반사였다. 후회는 오래갔다. 시간이 지나도 적절한 표현을 끝내 찾지 못한다. 어떤 말을 해 주어도 내 진심이 그의 고통에 닿지 못할 것 같아 늘 언저리에서 맴돌게 된다. 그렇게 아쉬운 시간을 흘려보낸다. 



  얼마 전 친한 친구의 아이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다. 아이의 두통을 염려되긴 했지만 간헐적인 일이라 지켜보고만 있었다. 증상이 심해져 검사를 받았더니 앞으로 큰 수술을 두 번 정도 받아야 한단다.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딸아이의 뇌 수술이라니 듣는 나도 다리에 힘이 풀린다. 담담히 심정을 이야기하는 친구의 목소리가 흔들린다. 어떤 위로를 해 줘야 할지 무거워진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귀와 입이 둔탁해진 채 세찬 폭포수 아래에 선 기분이 들었다. 듣기 좋으라고 근거 없는 희망만 남발할 수도  끓어오르는 걱정의 눈빛을 들킬 수도 없는 일이었다.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을 생각했다. 앤과 하워드는 아들 스코티를 뺑소니 교통사고로 잃는다. 스코티의 여덟 번째 생일이었고 그녀는 아이의 생일파티를 위해 케익을 주문했다. 스코비가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는 동안 앤은 주문한 케익을 까맣게 잊었다. 빵 장수는 찾아가지 않는 케익을 독촉하기 위해 그녀에게 계속 전화를 건다. 고통에 허우적거리던 앤은 장난전화처럼 걸려오는 전화에 화가 나 남편과 함께 빵집을 찾아간다. 고요한 밤이면 빵 장수는 늘 빵을 굽고 있었다. 아들을 잃은 부부에게 빵 장수는 말없이 갓 구운 빵을 내민다. 고소한 빵 냄새는 심연 속에 가라앉은 절망을 어루만져 준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을 것 같던 허기진 슬픔이 조금씩 녹아든다. 빵집의 형광등 불빛이 마치 햇빛처럼 느껴지는 마법이다. 누군가의 축하를 위해 주문된 케익과 빵들. 빵 장수는 자신이 꽃 장수가 아닌 빵 장수라서 다행이라 생각한다. 



  우리가 생각하는 별것 아닌 것들 뒤엔 진짜의 별것이 숨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별것이 표현하는 것은 사소하고 볼품없어 보이지만 등 뒤에 숨은 위로의 진심은 작은 것들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다. 미세한 반짝임이 정령의 기운이 되어 따뜻하게 안아준 것이 아닐까. 새벽이 올 때까지 빵 장수와 둘러앉아 빵을 나누는 시간이 아들을 잃은 부부에게는 위로와 애도의 시간이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싶을 땐 소설 속 장면을 마음으로 그려본다. 진심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지친 마음에 불빛 하나를 던지는 힘이 있다.



  수년 전 아이의 눈빛이 외로워 보이던 날들이 있었다.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는 말 수가 적어졌고 학교에서 돌아오면 말보단 눈빛으로 심정을 표현했다. 늦은 저녁 아이는 거실 카페트에서 반려묘 달이와 함께 누워 있었다. 둘은 침묵 속에 가만히 오랫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다. 그 시절 내가 바라본 가장 부드러운 아이의 눈빛이었고 달이도 형아에게 촉촉하고 그윽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 그 장면이 아름다워 사진으로 남겨둘까 생각했지만  이내 단념했다. 눈빛은 사진으로 담을 수 없는 보이지 않는 사랑이었다. 소중한 순간을 깨뜨리고 싶지도 않았다. 모른 척 짧지만 강렬한 그들의 교감을 함께 만끽했다. 사랑의 힘은 질기고 강하다. 지금 간직한 아이의 건강함에는 달이의 충만한 위로가 살푼 얹어져 있음을 나는 늘 기억한다.



  누군가를 위로하는 일이 서툴다고 생각했던 건 오만과 욕심 때문일지 모르겠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을 벗어둬야 상대를 진심으로 안아줄 수 있지 않을까. 빵 장수가 내놓은 빵은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의였고 달이가 건네는 따스한 눈빛도 오직 아이를 사랑하는 눈빛이었기에 가능했을거다. 거대한 영향력으로 치유를 주는 위로는 신의 영역일 것이다. 어떤 내일이 다가올지 모르는 삶에 한 발 한 발 나아가는 인간은 고난의 생을 함께하는 동지의 마음으로 서로 어깨를 빌려주고 내주는 일이 최선일 것이다. 내어준 어깨에 충만한 위로의 정령이 사뿐히 내려앉기를 소망할 뿐이다. 



  독일의 철학자 셸러는 "동감하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만큼 동감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만큼만 그리고 사랑의 깊이만큼만 동감한다는 명료한 법칙에서 알 수 있다."라고 말한다. 타인을 향한  공감과 위로의 마음은 상대에 대한 순정한 사랑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위로가 서투르다 생각했던 건 온전한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사회적 의무감이 아닌 타인의 고통에 내 심장이 머무는 위로는 그저 함께 있어주는 것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이렇게 쉽고 명확한 진리를 잊고 산다.



  타닥타닥 케익의 겉면이 익어가면 사방에 고소한 버터 향이 퍼져나간다. 달이가 냄새를 맡으며  다리 사이를 오간다. 수술이 두려운 아이가 맛볼 장면을 그려본다. 그 순간  고소한 맛이 더 풍부해지길 주문을 건다. 미소 지을 아이를 떠올리니 내 마음도 잘 익은 케잌처럼 부푼다. 소박한 격려를 건네려 구웠는데 오히려 오븐의 온기가 긴장된 내 어깨를 토닥거린다. 쨍한 형광등 빛이 따스한 햇살처럼 느껴지는 부부의 마음을 이제야 나도 조금 이해할 것 같다.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소설의 빵 장수처럼 이렇게 툭 한마디 던지고 싶어진다.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될 거요."



*레이먼드 카버의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 막스 셸러 <동감의 본질과 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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