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소의뿔 Jan 07. 2024

그날의 게임은 내 속의 짐승을 깨웠다.

이게 그럴 일인가?

2023년 12월 어느 날 저녁이었다. 한 모임 송년회 순서 중 팀별 게임이 있었다. 작년 송년회의 게임에서, 신규 회원이지만 실력 발휘를 제대로 했으니, 이번에도 톡톡히 보여줄 것을 믿는다는 지인들의 눈빛을 보고 약간 어깨가 으쓱했다. 이게 또 뭐라고 어깨에 힘이. 


모두가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며 작년이랑 동일한 문제를 들고 온 주최 측. 작년에 보여줬던 빠릿빠릿함은 어디로 가고 어버버 하는 상황. 나를 믿겠다던 지인이 말했다. "올해는 왜 이러는 거예요? 작년처럼 못 하네..." 순간 왜 그렇게 식은땀이 나는 것인지.


'뭐지, 이 상황?' 하는 순간 작년과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행사장의 어두운 조명, 형편없이 낮은 해상도의 빔프로젝트, 녹색 바탕에 흰색 글자로 적힌 문제. 게다가 요즘엔 노안으로 보는 것도 작년 같지 않다. 갑자기, 저 밑에서부터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포효했다. "안 보여요, 문제가 안 보이는 데 어떻게 맞추란 말이야? 주최 측, 너무 한 것 아니에요?" 


순간 싸한 분위기. 이게 그럴 일인가? 재미있는 시간을 위해 진행하는 게임에서, 그렇게 까지 맞설 일인가? 라고 말하는 듯한 시선들.


그날 밤, 나는 잠을 쉽게 이루지 못했다. 밤새 끙끙거리며 포효한 진짜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지면 절대 안 되는 생존을 건 경쟁도 아니었고, 스크린에 보이는 게임 문제들은 모두에게 가독성이 떨어졌다. 그런데, 나는 이를 '기울어진 운동장'으로 인식했다는 것, 그래서 형평성이 없다고 판단한 것이 잠을 이루지 못한 첫 번째 이유이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게임에서 진다 해도 태연하게 웃을 수 있어야 하는 넓은 마음의 인성을 보이지 못한 것이었다. 주최 측을 '편파적'이라 몰고 이성을 잃어 항의하는 모습, 이 얼마나 성숙하지 않은 모습인가?   


내 속에 숨죽이고 조용히 살던 짐승이 마구 날뛰는 것을 경험한 그 사건에서 나는 내 진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경쟁을 싫어해. 경쟁 상황이 되면, 양보를 하던가 가능한 한 그 상황을 피하려 해.'라고 말하던 것이 가식이었음을 알았다. 나는 지극히 지기 싫어하는 사람이었고, 실력이 없거나 열등하기 때문에 지는 것이 싫어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멀어진 것이었다. 이 모든 언행의 시작에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게 그럴 일인가'라고 생각할 뜻밖의 상황에서 내 가식, 짐승의 모습을 발견한 것, 그리고 어떤 이유로 짐승이 날뛰는지 깨닫게 된 것이 어쩌면 다행이다. 진짜 중요하고 심각한 경쟁 상황에 놓일 때를 대비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적어도, 나는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쉽게 휘둘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2024년에는 내면 소통으로 마음 근력을 강화하는 데 더욱 힘쓸 예정이다. 올해 송년회에서는 '이게 그럴 일인가?'라는 사건은 없는 것으로.    

작가의 이전글 기억 속의 감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