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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소의뿔 Jan 09. 2024

맛있는 말의 시작은 청자 알기로부터.

맛있다고 느낄 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말로써 말 많으니 말 않을까 하노라.'

고등학생 때 사용하던 철필통에 떡 하니 붙였던 말이다. 이 문구가 어쩌다 마음에 꽂혔을까?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은 내가 말하려는 의도가 정확하게 잘 전달되지 않았을 때, 그래서 상대가 오해하는 발생하고 나는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잦았기에 이런 사고를 방지하는 차원에서 그런 신조를 품고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억이 정확하지 않을 수 있으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 당시 나는 대구에서 서울로 전학을 와 심경이 매우 복잡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는 것이다. 말로 말을 만들지 않기 위해 집이나 학교에서 가능한 한 나를 표현하지 않았다. 


그때가 지금 내 말 짓기를 결정했다면, 그건 말이 안 된다. 그동안 말에 투자할 시간은 아주 충분했기 때문이다. 사실과 결론 중심의 군더더기 없이 간단명료한 말로 굳어진 이유는 다른 것에 있다. 생각해 보니 나는 말을 잘 지었을 때 느끼는 재미와 보람을 느끼지 못했다. 조금 더 깊이 들어가 보면, 나는 상대가 어떤 것에 혹할지 관심이 없었다. 상대의 기분을 살피고 그에 맞게, 그의 상황에 맞게 다양한 내용과 형식으로 말을 지어본 경험에 대한 기억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그러니 청자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또는 귀가 커져 나에게 기울이며 더 잘 들으려는 모양도 보지 못했다. 맛은 없지만, 내가 하는 말을 듣는 정도.    


정보와 의미를 전달하는 사람에게 말의 내용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맛을 내는 것이다. 말이 맛있다는 것은 청자가 지루하게 느끼지 않고 흥미와 호기심으로 화자의 이야기에 빠지는 것을 뜻한다. 맛있는 말은 없던 관심도 만들어 내고 귀로 들으면서 동시에 눈으로 생생한 장면을 보게 한다. 청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생각 근육을 움직이게 하고, 정보가 또 다른 정보와 연결되게도 한다. 


맛있는 말을 짓는다는 것은 말하는 기술을 잘 갖추었다는 것과 다르다. 맛난 말을 하는 이들은 청자가 무엇에 관심 있는지를 안다. 화자가 전달할 수 있는 내용보다, 청자가 듣고 싶은 내용이 무엇인가를 안다. 그가 그날, 그 시간에, 왜 그 자리에 있는지를 깊이 생각해 짐작한다. 화자가 주제를 던졌을 때 청자가 반응하는 이유는 그가 그 주제에 대해 이미 탐색이나 관찰을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이는 곧 청자의 적극적 경청 가능성을 의미한다. 내가 맞이할 청자들은 어떤 말을 맛있다고 느낄까? 


청자는 그들이 맛있다고 느끼고 싶다는 기대를 가지고, 화자는 그들이 맛있다고 할 말을 내놓을 때, 통한다, 맛있다! 말이 군더더기 없이 담백하던, 또는 향신료를 가득 붓거나 온갖 양념으로 감각을 자극하던, 흥미로운 경험이 많아 말할 꺼리가 많던, 그렇지 않던, 그런 것이 말의 맛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말을 맛있게 짓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맛있게 잘 들을 수 있는 말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 이것의 시작은 청자를 제대로 아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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