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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Mar 10. 2024

기원전의 기둥들 사이에서

그리스 여행기 1

십 년 만에 다시 아테네에 왔다. 어느덧 그리스 도착 5일 차. 십 년 전의 내가 이 도시를 왜 그리도 좋아했는지, 어째서 휴가지를 고르다 문득 다시 생각이 났는지 매일매일 깨닫고 있다. 바로 갈 수 있는 비행기 편이 없어 카타르를 경유해 18시간을 이동했지만, 치안이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도 좋지 않아서 바로 어제도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지만 아무튼.


기원전에 지은 건물의 기둥들이 여전히 곳곳에 널려있고, 거대한 아크로폴리스가 높은 곳에서 도시를 굽어보고 있는 광경만으로도 그 모든 아쉬움은 상쇄된다. 이 낯선 풍경은 결코 익숙해지지 않고 온갖 상상력을 자극하며 나를 설레게 한다. 기원전이라니! 일 년도 십 년도 다 별 일 같은 세상에 수천 년 전 사람들의 흔적들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마음이 평온해진다. 복잡한 도시의 위성사진을 조금씩 줌아웃 하다 보면, 도시이다가 나라이다가 대륙이다가 그냥 동그란 지구가 되는, 그런 영상이 좋은 것과 비슷한 감각 같다. 어차피 다 작은 점이고 찰나의 빛이라니까! 허무에 빠지기보다는 오히려 자유롭다.


수천 년 전 사람들이 무덤가 비석에 새겨놓은 알 수 없는 글자들 -아마도 사랑과 존경의 말들-을 보다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는 옛 건물의 흔적을 보다가, 카메라를 든 사람들 떼는 익숙하다는 듯 양지바른 곳에서 하품하는 고양이를 보다가, 야외 테이블에서 화이트 와인을 마시고, 아이스크림 한스쿱을 사들고 거리를 걷는다. 원하던 자유, 바라던 휴식이다. 햇살 듬뿍 받고 자란 토마토와 올리브, 와인, 치즈를 맛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풍성한 식재료들 덕에 뭘 먹어도 입안 가득 풍미가 퍼진다.


  , 그리스는 2월의 유럽을 돌아다니며 춥고 우중충한 도시들에 지쳐있던 나를 따뜻하게 맞이해  도시였다. 날씨도 여전, 오렌지 가로수 나무도 여전, 어디서든 아크로폴리스를 올려다보게 되는 풍경도 여전했다. 지난  , 내겐 이십 대와 삼십  사이에서 많은 사건이 일어난 시간이지만, 수천  전의 돌멩이들이 심심찮게 발에 차이는  도시에선 어림도 없다. 모든 것이 여전해서,  여전함이 그리웠던 나는  느리고 오래된 도시에서 잔물결처럼 돌아다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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