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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련 Mar 17. 2024

무대 뒤의 그림자가 드리울 때

그리스 여행기 2

그리스 여행 마지막 날, 피레우스 항구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카페에서 글을 쓰고 있다. 이번 여행을 한 줄 요약하면 ‘자알 쉬고 갑니다!’


머무는 12일 동안 그리스는 내가 여행에서 바라는 거의 모든 것을 줬다. 따뜻한 날씨, 멋진 풍경, 지적 재미, 맛있는 음식. 매일매일 호텔 침구에 파묻혀 푹 잤고 세 권의 책과 세 편의 영화를 봤다.


sns에 사진들을 몇 개 올렸더니, 유럽 여행을 계획 중인 친구들에게 연락이 왔다. 어느 나라에 갈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리스를 진지하게 후보에 넣어야겠다는 말들이었다. 최상급의 표현들로 이 나라를 칭찬하며 추천하다가 마지막에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근데 치안이 별로 좋지는 않은 듯. 소매치기 조심.


그랬다. 이곳의 치안은 확실히 좋지 않아 보였다. 마피아나 총기 난사 같은 종류의 ‘진짜’ 위협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나를 종종 두렵게 했던 건 대체로 어두운 표정으로 길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이었다. 어쩌면 위협이 아닐지도 모르는.


도착하자마자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지하철에서부터 어린아이를 안고 통로를 거닐며 동냥하는 젊은 여자를 봤다. 번화가에서는 어린아이들에게 소매치기를 당할 뻔했다. 꽃을 든 어린 무리가 우리 뒤에 가까이 붙기에 혹시나 싶어 등에 메고 있던 가방을 황급히 앞으로 돌리니 금세 가방 지퍼가 열려 있었다. 그 순간 뒤에 있던 아이들이 빠르게 내 앞으로 다가와 내 혼을 빼놓으려는 듯 꽃을 얼굴 앞에 내밀었다. 가방을 붙잡은 채 황급히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입장료가 있는 명소의 장점은 그런 불안에서 자유롭다는 점이었다. 다행히 잃어버린 건 없었다. 전문적인 일당은 아닌 것 같았다.


며칠 전에는 항구에서 배가 취소되어 당황하고 있는데 서너 살쯤 된 아이들이 다가와 돈을 달라는 듯 계속 손을 내밀었다. 어제는 쇼핑으로 유명한 거리에 갔다가 자신의 잘린 손을 흔들어 보여주며 앉아있는 남자를 봤다. 계속 거리의 사람들이 눈에 밟혔다. 이런 점에서도 이곳은 십 년 전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다는 건 안다. 마음이 안 좋은 것과 별개로 나는 그들에게 동전 한 개 주지 않았다. 그렇지만 거리의 사람들이 단순히 내 여행의 방해 요소, ‘비추’ 포인트 정도가 되는 게 맞나 싶은 생각은 든다. 복지 시스템이 작동을 안 하는 건가? 적어도 아이들이 저러고 다니는 일은 없어야 하는 거 아닌가. 조금 화가 난다. 어린 나이에 길에 머무는 경험은 그들의 삶에 오래 남을 것 같아 괜히 걱정이 된다.


그렇지만 또 그 화가 오래가지는 않는다. 이내 눈앞의 새로운 것들을 보며 감탄하고 사진을 찍기 바빠진다. 그러니까 어쩌면 이건 가벼운 위선의 마음이거나, 방어기제 정도. 순식간에 내가 하고 있는 관광과 쇼핑이 한없이 사치스러운 것이 되는 그 불편함을 덜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냥 그런 장면들은 적당히 외면하고, 잠시 머무는 여행자로서 이들이 자랑스레 보여주는 무대 앞면만 보는 게 맞나, 하는 숙제가 계속해서 남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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