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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다나 Apr 15. 2024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손 트인 환자들

중증근무력증 진단으로 신경과에서 협진을 보며 인공호흡기 치료(ventilator care)를 하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다. 인공호흡기 치료를 처음 하게 되면 기도까지 연결되는, 직경이 꽤 되는 튜브를 입에 물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말을 할 수 없다. 게다가 이 과정이 꽤나 답답하고 고통스럽기 때문에 환자 상태에 따라 진정/수면제를 투여하면서 치료를 진행하게 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보통 살짝 잠들어있는 상태라고 이해하면 쉽다. 



이 환자분의 경우도 2주 넘게 재우면서 치료를 했었고, 초반에는 진정 상태에서 가끔씩 깰 때마다 자신의 몸을 컨트롤하지 못하는 상황이라 안전을 위해 억제대를 적용했었다. 손목억제대, 즉 손을 못 움직이도록 고정해 놓는 장치는 환자가 치료기구를 임의로 제거해서 위험해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음이 아프더라도 해놓을 수밖에 없는데, 아무래도 움직이지 못하는 데다가 묶여있으니 손이 붓기도 한다 (압박하는 힘이 강하지 않더라도 그렇다. 내가 2주 넘게 손을 하늘로 치켜세우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는다고 생각해 보면 결과를 상상하기 쉽다). 환자 분은 차츰 호전이 되기는 했지만 인공호흡기를 제거할 수 있을 정도의 회복은 아니었고, 조금 더 적용해야만 하는 상황이라 기관절개술(tracheostomy)을 진행했다. 입에 물고 있는 튜브는 오래 하고 있을 수가 없어 목에 절개 구멍을 내어 그 자리에 튜브를 거치시키는데, 이를 위한 시술이 기관절개술이다. 목에 달고 있는 튜브는 입에 달고 있는 튜브보다 제거의 위험성이 적어 다른 위험 요소도 다 없이 괜찮다면 억제대를 해제시킬 수 있다. 이 환자 분도 기관절개술을 하게 되는 시점에는 의식 상태도 거의 또렷해져서 그제야 억제대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환자 분들의 억제대를 풀어드릴 수 있게 될 때마다, 간호사들도 마음이 좋다. 그동안 고생하신 것이 감격스러워 축하드린다고 말씀드리며 손이 땡땡 부어있으니 잼잼(손 쥐었다 폈다) 운동을 하시라고 알려드리곤 한다.


  "할머니, 손 잼잼 여러 번 하셔야 손 부기가 빨리 빠져요. 열심히 하셔야 해요!"


할머니는 너무 오랜만에 눈을 뜨고, 또 손이 자유로워진 것이 신기하셨는지 한 동안 물끄러미 자신의 양손을 바라보셨다. 손을 뒤집어서도 한참 살펴보고 천천히 손가락부터 움직이시더니, 이내 아주 힘차게 쥐었다 폈다 운동을 시작하셨다. 쉬지 않고 열심히 하는 모습이 너무 귀여우셔서 '글씨도 쓰실래요?' 하고 물어봤더니 좋다고 하셨다. 플라스틱 판에 A4용지를 몇 장 껴서 내 호주머니에 있던 펜과 함께 드렸더니 제일 먼저 쓰셨던 말이 '선생님, 사랑해요'였다. 오랜만에 자유로워져서 하신 첫마디가 고백이라니! 머쓱하면서 좋기도 하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긁적긁적하며 '감사해요' 하고 대답했더니 목소리 없이 빙긋 웃는 모습이 또 너무 귀여우셨다. 환자들에게 받는 심쿵은 이런 순간에 온다.  



할머니의 글씨 연습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마치 처음 말 트인 아이처럼 손이 트인 할머니는 알파벳 ABCDEFG를 써 내려가셨고 또 뭘 써볼지 살짝 고민하시더니 병원 이름을 적고 '짱 ♡♡' 하며 그림도 그리셨다. 끊임없이 손으로 하트를 발사하시더니 갑자기 무언가 내게 열심히 말하시려고 하시는 게 아닌가. 말로 해주고 싶으셨는지 글로 적는 게 아니라 입을 움직이셨는데, 목소리가 나오지 않으니 입 모양을 보고 유추해야 했다.


 "펜이 너무 예뻐요."


 보통 중환자실에서 간호사 일을 오래 하면 입 모양 맞추기에 대가가 되어있는데, 어떤 말을 할지 대충 짐작하는 것부터 시작하기 때문에 이번 것은 꽤 어려웠다. 펜이 예쁘다고 얘기하실지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냥 흔하디 흔한 3색 볼펜이었는데 눈이 막 동그래지시며 손가락으로 펜을 콕콕 가리키며 예쁘다고 진심으로 표현하시는데, 참 이렇게 환자와 사랑에 빠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맨날 기운 없이 누워있던 환자분들이 뭔가를 좋아하고 활력을 얻는 걸 보면 나도 힘든 근무시간 중에 웃게 되고 힘이 난다. 대단한 것도 아니고 이런 소소한 것으로부터 기운을 얻는 환자분에 비해 나는 뭔가 항상 큰 것만 바라오지는 않았는가 고찰해보기도 한다.


 "할머니 펜 가지셔도 돼요. 핑크색 펜이 할머니와 잘 어울려요."


 혹시나 병동 올라갈 때 까먹고 놓고 가실까 봐 (특히나 병원에서의 펜은 뒹굴다가 어느샌가 보면 누군가의 호주머니 안에 들어가 있다) 환자 이름표도 펜에 붙여드리고 꼭 챙겨가시라고 했는데 또 말없이 이름 스티커를 소중하게 만지작만지작 하시는 모습에 또 한 번 미소가 터지고 말았다.



손을 못 쓴다는 건 어떤 기분일지 상상해 본 적이 있었다. 아예 깊이 잠들어있어서 몸을 움직일 의지가 없다면 모를까, 깨어있거나 간간히 깨어났을 때 자세가 불편해 몸을 뒤척이는 건 물론이고 손 하나 까딱할 수 없다. 움직여보려고 애쓰다 과해보이면 위험을 감지한 간호사는 더 단단하게 고정을 해둘 수밖에 없다. 간호사가 주기적으로 체위를 변경해 주는 시간이 있고, 그 주기가 되지 않았더라도 여력이 된다면 움직일 수 있도록 손을 풀어드린다. 단, '언제든 환자보다 빠르게 위험을 차단할 수 있을만한 체력과 민첩함을 장착한 모드로' 눈을 떼지 않고 옆에 서 있어야 한다. 간호사 수가 충분하지 않은 병원 환경에서 현실적으로 움직이는 자유를 많이 주기 어려우니 환자도 간호사도 힘들 수밖에 없다. 환자가 하고 싶은 말이 있을 때도 비슷하다. 억제대를 잠시 풀고 환자는 종이에 글씨를 써서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해야 하고, 간호사는 글씨를 적는 동안 옆에서 기다렸다가, 보고 응답하고, 또 대답을 기다렸다가 응답하는 방식으로 소통한다. 가끔 알아보기 난해한 필적을 해석해내야만 하는 웃긴 임무가 주어지기도 하고 그 때문에 의사소통의 오류로 서로 답답해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한다. 그냥 말로 주고받는 대화보다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어 환자도 하고 싶은 말을 다 못 하는 제약이 있었을 테니 긴 시간 끝에 억제대에서 해방된 환자는 할 말이 쏟아져 나온다. 목소리가 안 나오는 환자는 글씨로, 아예 튜브를 뺄 수 있게 된 환자는 다소 잠긴 목소리부터 시작해 나중엔 쩌렁쩌렁 떠들기도 한다. 한시도 쉬지 않고 말하는 환자에게

 "악, 할아버지 말 원래 이렇게 많은 분이셨어요?"

하고 놀라기도 하지만 떠드는 게 건강하다는 징표이니 내심 고맙다.



입과 말이 트이는 날은 환자분을 제대로 만나보는 날인 듯하다. 중환자로서 한 차례 고비를 넘긴 뒤 드디어 의사소통이 가능해져 마주하는 환자들의 모습은 다양하다. 긴 잠에서 깨어나 새로운 상황에 어리둥절해하며 적응하는 순수함 100%의 할머니, 그간 너무 힘드셨는지 말할 수 있게 되자마자 구수한 욕을 뽑아내는 할아버지 등등 아이 같은 귀여운 환자분부터 재잘재잘 수다쟁이 환자분까지. 웃는 날도 힘겨운 날도 있지만 환자가 이렇게 긴 치료를 이겨내주어 오는 상황이라는 건 항상 뿌듯하고 고맙다. 같이 튜브를 제거한 담당의와 함께 '그 동안 고생많으셨어요'라고 건네는 말에는 많은 의미와 진심이 담겨있다. 치료에 부응하여 회복해줘서 고마운 마음, 힘든 시간을 버텨주어 대견한 마음, 조금 더 회복시켜 무사히 중환자 치료를 끝내겠다는 우리의 의지까지 담아, 알아주지 않아도 좋으니 이뤄지길 바라며.



-202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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