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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짜글쟁이 Jan 10. 2024

양배추 떡볶이 1

우리 엄마

 오래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는 않는다. 어쩌면 기억하고 싶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오늘 그 묻어둔 기억을 굳이 꺼내어 펼치고 싶어졌다.


그 동네를 떠난 건 5학년 가을이다. 아마 그 일은 3학년이나 4학년 봄 혹은 가을이었던 것 같다. 사실 ‘그일’이라고 할 만큼 대단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게 그 일은 기억에서 영원히 돋아나지 못하도록 아주 지워버리고 싶은 일이다.  


 그때 우리 가족은 어느 허름한 주택 꼭대기 층에 살고 있었다. 대부분 주택 꼭대기에 주인집이 사는 것과 달리, 우리는 세 들어 살았다. 엄마는 옆 건물 1층 미용실 아줌마와 친하게 지냈다. 미용실은 이발소 같은 곳이었다. 아줌마가 난을 좋아하셔서 미용실 안에도 온통 난이 가득했고 미용실 이름도 ‘난미용실’이었다. 아줌마는 고등학생 아들과 돌이 채 되지 않은 딸이 있었다. 늘 그 어린아이를 업고 일을 하셨다.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재혼한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라고 했다. 아줌마는 고등학생 아들이 손가락 빠는 버릇을 고치지 못해 늘 걱정하셨다. 어쨌든 아줌마는 엄마와 비슷한 점이 좀 있었다. 결코 젊지 않은 나이에 어린 자식을 포대기에 동여매고 억척스레 살아가는 점, 그리고 아들들이 모두 손가락을 빠는 점 등이 닮아 있었다.       


 엄마는 부업을 했다. 부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의 월급만으로는 애 넷을 키우기 힘들었고, 나가서 돈을 벌기에는 동생이 너무 어렸다. 동생은 도무지 엄마와 떨어지질 않았고, 엄마가 조금만 자릴 비우면 동네가 떠나가도록 울었다. 그래서 엄마는 식당에도 나갈 수 없었다. 그런 동생 덕분에, 난 온갖 종류의 부업을 보며 자랐다. 그중에서도 고무 자르기가 제일 흥미로웠다. 쪽가위로 자동차에 들어간다는 고무링을 정리하는 일이었고, 고무 자르기는 쉽고 간단해 나도 엄마를 도울 수 있었다. 엄마가 열 개쯤 할 때 나는 서너 개쯤 잘랐다. 또 하나 인상적인 부업은 색연필 조립이었다. 이유는 모르나 항상 빨간 색연필만 가득 왔는데 내가 그 빨간 심을 자꾸 부러트려서 엄마가 구경만 하라고 했다. 힘 조절이 생명인데 나는 그 작은 손으로 자꾸만 엄마의 밥벌이를 부러뜨렸다. 색연필 공장 사장은 부러진 색연필 심은 그만큼 차감한다고 했다. 어쨌든 엄마는 한 푼이라도 더 벌기 위해 사투를 벌였다. 그것은 정말로 사투였다. 어리기만 한 내 눈에도 엄마의 모습은 그렇게 보였으니까.

   

 아빠가 퇴근할 때까지 그리고 언니들이 학교에서 늦게 돌아올 때까지, 엄마와 둘이 집에 있을 때면 엄마는 눈물을 자주 보였다. 가슴을 치면서 울기도 했고, 무슨 죄를 그렇게 많이 지었냐고 울부짖기도 했다. 엄마가 울면 나는 속으로 훌쩍이며 책상에 앉아 문제집을 푸는 척했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대처였다. 그렇게라도 해야 엄마가 조금의 위안을 얻을 거라 믿었다. 어쩌면 지금까지도 내가 공부를 하는 이유는 엄마가 그만 울기를 바라서 일지도 모른다. 그 당시 엄마에게 왜 우냐고 한 번도 물어본 적은 없었다. 혹시라도 나 때문일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엄마는 하루하루가 고된 사람이었다. 그런 엄마의 뒷모습은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처럼 나약해 보였다. 160cm도 되지 않은 작은 키를 가진 우리 엄마는 정말로 작디작은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모든 말과 감정을 속으로 삭이던 나는, 엄마에게 말대꾸를 한 적이 없다. 용돈을 달라고 해본 적도 없었다. 그래서 난 친구들이 학교 마치고 집에 갈 때마다 사 먹던 500원짜리 피카추 꼬치를 한 번도 사 먹어 본 적이 없었다. 친구들에게 한 입 얻어먹으면 그만이었지, 한 번도 용돈으로 사 먹은 일이 없었다. 한 번은 내 주머니에 300원이 있는 걸 보고, 친구가 '너도 돈이 있구나?'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게 이상하거나 부끄럽다고 생각한 적이 없다. 그런 일로 엄마에게 대들거나 징징거리지도 않았다. 그 이유는 내가 착하거나 어른스러워서가 아니고, 그저 태어날 때부터 용돈 받는 사람은 정해져 있는 줄 알았기 때문이다. 용돈을 언제부터 주는지 보통 얼마를 쥐어주는지, 그것이 가정의 규율 혹은 부모의 마음에 달린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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