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페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여희 Jan 23. 2021

02. 금감원이 뭔데?

페페의 위기

그녀는 한마디로 괄괄하고 통쾌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좁은 이마를 살뜰하게 드러내며 머리카락 한 올 없이 다 넘겨 하나로 묶은 머리만큼이나, 작은 얼굴에 비해 성큼성큼 맺혀있는 큰 눈, 코 입만큼이나 막힌 구석 없이 그녀의 성격은 시원했다. 그녀는 외모도 목소리도 하는 행동도 머뭇거림이나 주저함이 잘 없었다. 나의 눈에 비친 그녀는 존경할 만했고 닮고 싶었다. 그녀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환실의 업무에 완벽하게 적응했고, 알바로는 내가 선배이긴 했지만 어쩐지 의지가 되었다. 언제나 수줍어하고 망설여하는 나와 다른 그녀는 나의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물론 그녀의 그런 막힘없는 성격 탓에 곤란을 겪은 적도 있긴 했지만 말이다.
하루는 나와 페페 그리고 인중 언니(좁집게로 인중의 털을 뽑던 기묘한 그녀의 모습은 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는 몰아치는 대출상담 전화로 녹초가 되어 있었다. 씩씩하고 명랑하던 페페도 그날은 유독 지친 기색이 역력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그날 하루 동안 들은 전화기 속 욕지거리가 내가 삼 개월 넘게 일하며 들은 양보다 많을 만큼 그녀는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00 저축은행입니다.”
“야이 씨00들아, 너네들이 감히..”
“휴.. 어느 분이랑 통화하셨습니까?”
“너네 이 개 00 같은 것들이..”
페페는 잠시 대기 통화를 누르고 크게 숨을 고른 후 통화 속으로 돌아가 다시 말했다.
“아 네 고객님, 채권부서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명랑했지만 말의 어미에는 그날의 피곤함이 턱턱 묻어 있었다.
그러던 중 또다시 전화가 울렸다. 세명이 번갈아 가며 받는 전화였기 때문에 이번 전화는 페페의 차례였다. 앞에 앉아 있던 나는 전화를 받는 페페에게 뭔가 심상찮은 변화가 일어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어느 분이랑 통화하셨냐고요.”
그녀는 더 이상 고객 응대 스트레스를 억누르지 못했고, 격랑 하는 파도 위의 조각배마냥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 저기요. 그러니까 어느 분이랑 통화하셨는지 말씀을 하시라고요.”
“아니 그걸 모르시면서 다짜고짜 조금 전 통화한 사람을 찾으시면 어떡하라고요.”
“네. 여기 교환실이에요. 그럼 아무나 연결해드려요?”
그때 페페는 우리가 배운 전화 매뉴얼을 다 잊은 듯했고 페페를 말릴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그리고 또한 명, 교환실을 담당 원경제대리의 발걸음을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무것도 없는 듯했다.

원경제 대리.
큰 얼굴에 큰 코와 두꺼운 입술을 가진, 어떻게 보면 호남형, 어떻게 보면 두꺼비형의 서른 초반의 남자인 그는 교환실을 담당하는 대리였다. 딱 한 번만 만나보아도 그가 예쁜 여자를 좋아하고 술을 좋아하고 명품을 좋아하는 남자임을 알 수 있었는데 그가 하는 이야기는 주로 그런 위주였다. 그는 교환실의 규칙을 상기시키고 업무 환경을 개선하는 일을 맡고 있었지만 그가 주로 하는 일은 교환실 아르바이트 생의 외모를 점검하고 시시껄렁한 농을 건네는 일을 주로 하고 있었다. 그는 시시때때로 교환실 한편에 있는 가죽이 군데군데 벗겨진 낡은 소파에 앉아 날씨 얘기를 하곤 했는데 날씨가 좋으니 오늘 회식을 하면 어떻겠느냐란 이야기로 문장의 결말을 짓곤 했다.
“00 씨 오늘 귀걸이 예쁘네. 오늘 데이트 있나 봐요.” , “$$씨 얼굴 진짜 조막만 해. 살만 빼면 되겠어.”
반 존댓말을 섞어가며 아르바이트생들의 신상에 무한한 관심을 표현하는 그에 대해 우리는 뒤에서는 그의 느끼함과 무례함을 견딜 수 없어했지만, 앞에서는 가볍게나마 미소 지으며 얼렁뚱땅 넘어가 줄 수밖에 없는 아르바이트생의 입장이었다. 그가 자신의 차기 여자 친구 후보감을 고르는 잣대로 아르바이트생들을 훑고 있다는 것을 우리 모두는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선을 막무가내로 넘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를 대하는 우리의 얼굴은 언제나 가까스로 웃음을 드러내는 승무원들의 웃음 딱 그 정도였다.

그런 그가 쿵쾅거리며 걸음을 옮겨 교환실 문을 벌컥 열었다. 노골적으로 의도를 드러내는 걸음이었다. 노크 따위는 없었다.
그는 거만해 보이는 얼굴로 이것들을 어떻게 요리해주지라는 우월함을 드러내며 소파에 쓰러지듯 앉으며 다리를 꼬았다.
“페페. 어떻게 할 거야?”
반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내용이 형식을 지배하고 있었다. 페페는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금감원 사람한테 담당자 이름이나 대라고 했다면서.”
조금 전 페페가 피곤에 절어 아무나 연결해도 되겠느냐고 매뉴얼에 벗어나게 통화를 했던 사람이 하필이면 금감원 사람이었던 것이다. 페페와 통화를 마치면서 쓴웃음 소리를 내었다는 그 사람은 그 전화를 끊고 다른 직통번호를 통해 은행에 전화를 걸었고 교환실에 대한 컴플레인 또한 직통으로 했다고 했다. 그 당시 나는 은행에서 근무를 하긴 했으나 교환실에서 이백만 원 대출을 받겠다는 사람들과 입씨름만 주야장천 하고 있던 터라 은행의 전반적인 업무라든지, 금감원이 뭐하는 곳인지 잘 알지 못했다. 다만 뭔가 은행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관이겠거니.. 하는 정도만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아르바이트생들로부터 언제나 살짝 무시당하는 원대리였지만 이번만큼은 원대리의 말이 맞았다. 교환실이 조용해졌다. 눈알을 굴려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잠깐씩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게 해서 금감원에서 감사 나온다고 하면 페페가 책임질 거야?”
금감원 감사라고? 무슨 감사? 세무? 교환실이 그렇게 막중한 역할을 담당하는 곳이었던 거야? 큰일 났구나.
페페는 얼굴을 들지 못했다. 페페의 얼굴은 목부터 빨갛게 물들었고, 나는 페페의 그렇게 위축된 모습을 처음 보았다. 원대리는 부러 큰 소리를 내는 듯했다. 연극 톤의 대사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페페를 향한 것인지 교환실을 향한 것인지 아리송한 대사들도 나왔다. 교환실 기강이 해이해졌다. 교환실 분위기 쇄신이 필요하다. 그러니까 페페가 오늘 한 실수는 교환실의 해이해진 기강 때문에 일어난 일의 결과인 것이다.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 같은 말들이 연달아 나왔다. 십 분째 같은 말들이었지만, 맞는 말들이었기에 우리는 교복을 입은 고등학생들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페페가 말했다.
“그만두라면 그만둘게요. 죄송합니다.” 페페가 작은 소리로 말했을 때  원대리는 웃으며 페페의 자리 옆에 여분의 의자를 대고 앉으며 말했다
 “책임은 책임자가 지는 거지.”
원대리가 갑작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고, 느끼함의 수준이 선을 넘고 있었지만 페페는 이것저것 따질 겨를이 없어 보였다. 아마 정말로 이번 일로 은행에 감사라도 나오는 날엔 은행으로부터 고소를 당할 수도 있다는 공포를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앞에 앉은 나와 인중 언니 또한 그 순간만큼은 원대리가 페페와 교환실을 구하러 온 구세주처럼 느껴진 것이 사실이었다.
원대리는 턱을 괴고 페페를 바라보며 이번 일은 내 선에서 잘 처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는 다음에 다시 또 이런 일이 일어나선 안된다는 것을 반복해서 말했다. 페페는 거듭 죄송하고 감사하다는 말을 이어갔다. 이십 대 초반의 우리에겐 감사원이란 기관이 너무나 거대한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인 것처럼 느껴졌고, 자기 선에서 마무리 지어 준다는 원대리는 아닌 걸 알면서도 믿을 수밖에 없는 유일한 동아줄 같았다. 우리가 원대리를 존경해 마지않는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을 때 원대리는 말이 나온 김에 오늘 회식을 제안했고 우리 셋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01. 00 저축은행 교환실입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