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더라.
“봉봉아, 머... 머리가.... 이... 이게... 뭐냐... 이 쥐 파먹은 머리는 당최 뭐냔 말이다...”
그래, 내가 방심했던 것 같다. 나는 너를 일반적인 세상 속에 살 법한 사람이라고 애써 밀어 넣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가 내가 일하던 카페에 들린 후, 그리고 연락처를 교환한 후 우리는 아기자기한 연애라는 것을 했다. 그는 10년간의 직업군인 생활을 그만두고 세상에 갓 튀어나온 싱싱한 금붕어 같은 사람이었다. 둘 다 어린 나이가 아니었기에 서로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았고, 자주 만나지 않아도 그다지 서운하지 않은 각자의 생활이 탄탄한 그런 어른스러운 연애였다. ‘너는 나의 선물이야. 그러니 난 너에게 받을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하지 않겠어. 난 단지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만 생각하겠어.’ 나는 지질하고 코딱지스러웠던 지난날의 연애사를 이제는 상큼하게 초월했다고 생각했다. ‘난 나로서 충분하지만(데피니틀리 나로서 충분치가 않았다) 네가 있으니 더 행복하다(그것만큼은 진실이었음을..)’ 나는 비로소 이제 드디어 성숙한 연애를 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손에서 통통거리던 금붕어 봉봉이는 우리 집에, 우리 부모님을 처음 만나는 날 금붕어 비늘 무늬의 나이아가라 펌을 하고 나타났다. 나이아가라 펌이라니.. 볼륨펌도 아니고 스트레이트 펌도 아닌 나이아가라 펌이었다. 광대뼈까지 내려온 머리는 뿌리부터 지글거렸고, 지글거리는 머리는 한껏 하늘로 솟구쳐 있었다.
“이... 이건 너무하잖아... 파마를 풀고 왔어야지..”
“아, 그런가, 너무 심한가?”
제 아무리 그가 나의 선물이고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만을 고민하기로 한 연애라 하지만 이상태로 부모님을 만나러 갈 수는 없었다. 급한 대로 근처 편의점에 들어가 남성용 왁스라는 것을 샀다. 물결은 없애지 못하더라도 솟구쳐 있는 머리는 눌러야 했다. 왁스를 척척 손에 바르고 보니 가만히 머리를 대고 기다리고 있는 그의 동그란 머리통을 한대 쳐주고 싶었다. 하지만 마음을 진정시켜야 했고 그의 머리도 진정시켜야했다. 나는 바빴다.
마음은 천천히 진정되어갔지만 머리칼은 진정되지 못했다. 아래로 빳빳하게 내리 꽂힌 빗자루 모양의 그의 머리가 어딘가 낯이 익었다. 어디서 많이 봤는데... 이런 사람 어디서 봤는데... 내가 웹툰을 좋아하긴 하는데 애봉이를 하필 오늘 우리 집 앞에서 만날 줄이야.
하긴 그랬다. 그는 군인 시절의 규칙과 규율을 견딜 수 없어 주위의 우려와 만류를 뿌리치고 사회에 나왔다고 했다. 그에 대한 반작용이었는지 한풀이였는지 그는 머리스타일을 참 많이 바꾸었다. 어느 날은 갑자기 삭발을 하고 나타났고, 어느 날은 반삭을 하고 머리를 묶고 나타났다. 어느 땐가 머리띠를 하고 나타났을 때 나는 아주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그에게 다가가 말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그가 삭발을 했을 즈음 춘천에서는 마라톤대회가 열렸다. 그는 출발선에선 자신의 모습을 꼭 사진으로 찍어달라고 했다. 콧 평수를 잔뜩 크게 하고 결승선을 통과한 마라토너처럼 주먹을 쥔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는 호기롭게 결승선에서 만나자라고 외치며 그는 출발선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딱 15분 뒤에 머리카락이 없어 저체온증이 올 뻔했다며 숙소로 뛰어들어왔다. 그는 언제나 한풀이하듯 하고 싶은 일을 했는데, 어떤 일은 머리카락 때문에 못하기도 했다.
부모님은 별 반응이 없었다. 대놓고 싫은 티를 내시면 어쩌나 싶었지만 다행히 그렇지 않았다. 그저 미적지근했다. 항공기 승무원들이 주로 짓는다는 팬암 미소를 지으며 엄마가 괜스레 내 어깨를 쓰다듬었다. 가까이 사는 큰언니 부부를 포함해 성인 여섯 명이 채 앉지도, 다 서지도 못한 자세를 바꾸지 못하고 있던 그 순간 형부가 앉읍시다를 외쳤다. 부러 큰소리를 낸 것인 게 분명한 어조였다.
대략적인 호구 조사가 이어졌고, 밥을 먹었다. 채소와 육류가 골고루 섞여 있었고 간간히 미소 속에 담소를 나누는 평범한 식사였다. 생각보다는 질문이 많이 오가지 않은 첫 만남이었다.
식사와 약간의 다과시간이 끝난 후 끝인사를 하는 그에게 엄마는 웃으면서 말했다.
“다음부턴 머리 그렇게 하지 마.. 아버지가 싫어해..”
팬암 미소가 현관문을 활짝 밝히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