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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페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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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여희 Jan 10. 2021

01. 00 저축은행 교환실입니다.

두 암컷 늑대의 단막극

페페는 나의 결혼과 동시에 나와의 인간관계를 끊었다. 아마도 그녀는 나의 방황과 그로 인한 고통의 시간을 함께 견뎌준 것이 아니라 그것을 간식으로 먹으며 세로토닌을 상승시키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와 페페가 처음 만난 것은 내가 21살, 페페가 23살이던 어느 봄, 한 은행의 좁은 전화 교환실에서였다. 학교를 휴학한 후 제2금융권 은행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던 나는 그날도 대출 가능 금액을 묻는 전화와 부채를 상환하지 않아 채권 부서로부터 싫은 소리를 들은 고객들의 볼멘소리를 상대하느라 애를 먹고 있었다. 당시에 은행은 교환 부서와 그 밖의 부서로 나뉘어 있었는데 은행의 모든 부서의 전화는 교환실을 통하여 연결되도록 되어 있었다. 교환실을 필두로 방사형으로 뻗어 나가는 전화선의 시스템상 은행으로 걸려오는 모든 컴플레인도 교환실에서 가장 먼저 마주하게 되어 있었다. 교환실에서는 하루 온종일 신용대출 200만 원이 가능한지 집 담보가 가능한지에 대한 문의 전화가 끊이지 않았고, 이곳은 은행의 교환실일 뿐이니 대출 담당 부서로 연결해드린다는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도 전화기 너머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꼭 200만 원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했다. 옹기종기 붙어 있는 세 개의 책상, 그리고 그곳에 앉아 근무하는 직원은 세명. 그나마도 한 명은 이 지긋지긋한 200의 굴레를 벗어나야겠다며 일주일 전에 그만두었다. 그리하여 수백 통의 신용대출 문의를 두 명이서 감당하고 있는 차였다.
“감사합니다. 00 저축은행입니다.”
“아까 전화받은 사람 바꿔.”
“죄송하지만 고객님, 이곳은 00 저축은행 교환실입니다. 조금 전에 통화하신 분의 성함을 알고 계십니까?”
“딴소리하지 말고 조금 전에 나랑 통화한 남자 바꾸라고 시발.”
“고객님,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이곳은 교환실입니다. 채권부서 직원과 통화하신 건가요?”
“그래, 그러니까 아까 통화한 새끼 바꾸라고.”
나는 밝고 맑고 무해한 톤을 유지하며 말했다.  
“네. 채권부서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하루 종일 이런 식의 통화를 수백 통씩 받아내는 것이 교환실의 주요 업무였다. 그러다가 버튼을 잘 못 눌러 채권부서로 가야 할 전화가 타 부서에 연결되는 날엔 내선번호로만 아는 은행 직원으로부터 진땀 나는 질책을 들어야만 했다. 그럴 때면 욕하는 고객 전화보다 더 기가 죽고 심이 상해 혼잣말이 절로 나오곤 했다.
“내 이 자식 면상 한번 꼭 보고 이딴 은행 그만두리라.”

처음 출근했을 때 교환실에는 사무용 책상 두 개에 나보다 나이 차이가 꽤 나 보이는 두 명의 직원이 일을 하고 있었다. 그녀들 역시 아르바이트 직원이었지만 뭔가 선임자로서의 여유와 꽤 많은 나이 차이가 가져오는(대략 10살 정도였던 것 같다) 가오의 차이가 있었다. 그때의 내 눈에 그녀들은 나이가 많은 두 암컷 늑대 같았다. 고요하게 있다가도 먹잇감이 발견되면 기민한 몸놀림으로 그날의 끼니를 기어코 때우고야 마는 육식동물 같았다.
“아 제가 소액..”이라고 고객이 말하면
“채권부서로 연결해 드릴게요.”라고 말했고
“아 제가 200만 워..ㄴ”이라고 고객이 말하면
“아 네. 채권부서로 연결해 드릴게요.”라며 상대방의 말을 가로챘다. 그녀들은 다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소액의 소자만 나와도, 이백의 이자만 나와도 그녀들은 어느 부서로 넘겨야 하는지 모든 것을 꿰뚫고 있는 황야의 주인이었다. 그리하여 낭창한 목소리로 발랄하게 먹잇감이 허점을 보이면 날래게 달려가 채권부서로 연결되는 버튼을 누르곤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좁디좁은 공간에서 하루 8시간을 붙어있으려니 이 두 명이 주인공인, 희비극이 작렬하는 단막극이 하루에도 십 수 번씩 재현되었다는 것이다.
하루는 이랬다.
“나는 혼전 순결을 지지해.” 둘 중 한 언니가 말했다. 왜 이 이야기가 나왔는지 시작을 알 수는 없다.
“부부 사이 이외의 성관계를 제외한 것은 모두 반대하고 있어. 자유로운 성관계라고는 하지만 어쨌건 혼전순결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상대의 인간성을 욕보인다고 볼 수 있어.” 이 언니의 가방에 성경책이 항상 들어있었고 꼭 성경책 때문이 아니라도 자신의 의견을 표현한 것에 대해 딱히 의문을 제기할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조금 더 나이가 많은 다른 언니의 생각은 달랐다.
“왜 그런 얘길 하는 거야? 넌 왜 그런 생각을 하는 거야?” 조금 더 나이가 많은 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이 언니는 왜 목소리가 떨리는 거지?
“아니 언니, 그게 무슨 말이야. 왜 그런 생각이라니? 이건 당연한 거 아니야?” 언니의 목소리가 커졌다. 왜 목소리가 왜 커진 걸까.
“내가 찔려서 그래. 내가 찔려서. 내가 바보라서 그래.”
너무나 급진적이고 갑작스러운 자기 고백이었다.
“아니 언니, 내가 그런 식으로 말한 게 아니잖아. 언니는 왜 그런 식으로 말해?”

아니, 저기요.
“내가 찔려서 그렇다고. 내가. 네가 날 찔렀다고. 내가 그렇다면 그런 거 아니야?”
오 마이 갓, 세상에...
“아니 언니, 내가 언니를 찌르려고 찌른 게 아니잖아.”
이즈음에 이 언니의 목소리는 동구 밖 옆 마을 사람까지 들릴 정도로 무척 컸다. 갑자기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고 가슴이 찔린 다는 언니는 뭐가 찔린다는 건지, 그런 식으로 말한 게 아니라는 언니는 어떤 식으로 말한 건지, 어떻게 이 둘의 하울링을 말려야 하는 건지 난감했다. 그리고 바로 옆방의 채권팀에 우락부락한 호랑이 무리가 여전히 “돈 갚으라고!”를 외치고 있었는데 그 소리보다 더 큰소리가 교환실에서 날 즈음에 겨우 그 둘의 비극이 중단되었다.
쾅쾅쾅.
채권팀의 누군가가 교환실의 문을 두드린 것이다. 쥐 죽은 듯 고요해진 교환실에서 우는 여자 하나, 얼굴 빨개진 여자 하나, 너무나 어른으로 보이던 두 여자의 철없는 토론 문화를 지켜보던 쪽팔림에 죽을 것 같던 여자 하나가 숨을 씩씩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오래지 않아, 아니 바로 그날, 퇴근 시간 되어 가고 있을 즈음 혼전순결을 주장했던 언니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한 시간 전부터 족집게로 인중의 털과 눈썹의 털을 뽑으면서.
“언니는 밀지 않고 뽑네요.” 눈썹 털은 몰라도 인중 털을 뽑는 모습이 기이하기도 하고 너무 아플 것 같아 내가 물었다.
“아, 난 깔끔한 걸 좋아해서”
그러자 혼전순결 발언으로 가슴이 찔렸다는 언니가 말한다.
“오, 너 오늘 좀 이쁘다.” 파운데이션 위로 흐른 눈물 자국이 파여 그 가장자리가 형광등에 반사돼 반짝 빛이 난다.
“언니가 그렇게 말하니까 부끄럽네. 하하. 나 한다면 하잖아. 꾸민다면 꾸며.”
언제나 입는 분홍색 바바리를 탁탁 털며 언니는 눈썹 아랫 자리와 인중 옆자리가 빨간 채로 가방을 들고나갔다. 그녀 가방의 성경책이 빼죽이 보인다. 그렇게 그날의 두 여자의 희극도 막을 내렸다.

그러던 어느 날 페페가 왔다. 혼전 순결 마상 언니가 제주인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며 불현듯 교환실을 그만두고 삼일쯔음 지났을 때였다.
작은 얼굴에 통통한 몸을 한 페페는 첫인사부터 씩씩했다.
“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그녀가 좋았다. 왠지 그녀는 내가 알고 있던 그 세계의 사람일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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