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는 Covid 19 감염자 수가 갑자기 치솟은 4월경부터 전체 lock down에 들어가서 회사를 가지 않고 재택근무를 한지가 근 4개월이 넘어가고 있다. 지금은 조금 풀어줬지만 시작 단계에서는 집 앞 슈퍼를 가거나 꼭 필요한 운동을 하는 외에는 외출이 금지되어 집 밖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거나 친구나 가족들을 만나는 것조차 제한되었다.
그 기간 동안 늘은 것이라고는 마신 와인의 코르크 수 정도이다. 대강 한 구석에 쌓아두었는데 곰실곰실 많이도 마셨다 싶다. 많은 와인 업체들이 도소매에서 오프라인으로 팔 수 없는 물량들을 배달로 소화하기 위해 프로모션도 걸고 이런저런 색다른 패키지들을 만든 것도 한몫 거들었다. 호주와도 가깝고 워낙 외국인 비중이 많아서 인지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편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들이 많은 이유도 있다.
가뜩이나 무료한 와중에 이것저것 새로운 와인을 시도해 보다가 유독 황금 옷을 입고 배달을 온 와인병이 눈에 띄었다. 싸지는 않은 한 병이었지만 그렇다고 유독 비싼 아이도 아니었는데 무언가 고급스러워 보이는 금색 망사(?) 실에 쌓여 있는 모양새가 독특하다. 마르께스 데 리스칼이라는 스페인 와이너리의 2015년 산 와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비교적 덜 배급되어 있지만, 한국 사람들이 일단 마셔보면 스페인 와인을 좋아하는 경우를 많이 보았다. 스페인은 포도 재배면적으로 따지면 무려 세계 최대 규모이고 와인 생산량은 세계 3위의 비중을 차지한다고 한다. 주정강화 와인인 셰리나 Cava라고 하는 스파클링 와인 외에도 료하(Rioja) 지역에서 난 레드와인이 유명한데 마르께스 데 리스칼은 료하 지역을 대표하는 유서 깊은 와이너리 중 하나이다.
그런데 금실은 뭐란 말인가. 이 와인을 배달한 업체에서 감아놓은 것일까 아니면 료하 와인들은 원래 이렇게 포장이 되어오나? 아니면 이 빈티지에 특정한 장식이던지 reserva 와인을 구분하기 위한 것 일수도 있다. 호기심이 발동해 이리저리 검색을 해보니 꽤나 흥미로운 배경이 있다.
1858년도에 Camilo Hurtado de Amezaga라는 사람이 당시 자신의 작위였던 마르께스 데 리스칼을 이름으로 걸고 와이너리를 만들었다고 한다. 보르도에 거주하며 프랑스 전통의 와인 제작 방법을 배운 그는 스페인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프렌치 오크통을 써서 프랑스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었는데 이 와인이 선풍적인 인기를 얻게 된다. 당시 왕이었던 알폰소 12세까지 이 와인을 애용하게 되면서 이 와인을 따라 만든 짜가(!) 상품들이 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자신의 브랜드와 와인의 질을 유지할 방법을 고심하던 창업자는, 사람들이 함부로 코르크를 벗겨 내용물을 바꿔치기하거나 라벨만 벗겨내 다른 병에 붙여 팔거나 할 수 없도록 와인병을 금실로 감싸는 방법을 고안해내었고 이후 이는 고급 료하 와인의 상징처럼 여겨지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이야 마이크로 칩 등 진품을 구별하는 다른 방식들이 생겼지만 전통의 상징이자 마케팅의 수단으로 아직도 저렇게 금실을 감은 자태로 와인을 보급한다고.
알고 보니 처음에는 양파망 같아 보였던 금실이 왠지 고급스러워 보인다. 귀하신 금실을 살살 벗겨내고 마신 와인은 진품이어서 그런지(!) 훌륭한 맛을 (적어도 내 입맛에는) 자랑한다. 새로운 방식으로 와인을 만들어낸 사람의 도전과 그 와인을 베껴내어 보려던 이름 모를 많은 사람들의 꾀와 술수의 이야기를 떠올리니 마시는 재미가 곱절이다. 때로는 마케팅이 필요 없는 구매를 자극하기도 하지만, 이럴 때는 기왕 한 구매의 질을 높여주는 가치가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