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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형 Jan 24. 2020

'병신'이란 말을 즐겨쓰는 내 오랜 친구에게

FROM. 프로불편러가 되버린 나

서울에서 주로 생활하다가 설날을 맞아 오랜만에 고향에 내려왔다. 

오랜만에 만난 10년지기 친구들과 함께 경남 지역에 주로 있는 옛날 감성 가득한 '동키치킨'을 뜯으며 맥주를 한잔했다.



 각자의 근황을 얘기하다가 한 친구가 본인이 방학 때 중소기업에 짧게 인턴을 잠깐 했었는데 함께 일하던 과 선후배 두명을 카풀해줬는데 본인이 운전하고 있으면 잠만 자고 인턴이 끝날 때까지 고맙다는 말 한마디를 못 들었다는 것이다. 얼마나 황당하고 분한 일인가.


"내가 너무 병신 같았어."

친구가 말했다.


친구의 안타까운 이야기와 별개로 '병신'이라는 단어가 귀에 박혔다. 하필 나는 친구를 만나기 직전 '선량한 차별주의자'라는 책을 읽었고, 하필 나는 최근에 이oo 의원이 장애인 비하 발언을 한 것에 대해 분개했었다. 게다가 아임뚜렛 이라는 한 유튜버가 장애를 소재로 활용해 사기를 쳤고, 나아가 그런 종류의 사기가 가능했던 한국 사회에도 문제가 있음을 깨달았던 최근이었다.  그냥 넘어갈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병신'이라는 단어는 장애인 비하 발언이며 굳이 써야할 이유가 없다면(없을 것이다) 다른 식으로 표현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에둘러 말했다.

  

"왜 그렇게 불편해 해. 친구니까 그렇게 말할 수도 있는거지. 다른 자리였으면 나도 이렇게 말 안했지."


맞다. 불편했다. 친구의 말도. 친구에게 말을 할까 말까 고민했던 시간도. 말을 하고 나서 친구에게 들은 말도.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또한 장소와 때 그리고 사람을 가리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는 것도 옳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오늘 만난 친구는나와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소중한 친구이고 앞으로도 계속 만나고 싶은 친구이다. 내가 불편해하지 않으면 앞으로도 계속 만나는 자리에서 같은 표현을 사용할 것이며 나는 계속 속으로만 불편해하고 친구는 내가 불편해 한다는 것을 모를 것이다. 억지로 괜찮은 척 아무일 아닌 척 할 수 있겠지만 그런 관계는 계속 지속될 수가 없다. 


더불어민주당 대표 "선천적 장애인은 의지가 약하다" (2020)

위와 같은 인물 "정치권에 정상인가 싶을 정도로 정신장애인이 많다" (2018)

자유한국당 대변인 "삐뚤어진 마음과 그릇된 생각을 가진 사람이야말로 장애인" (2020)


정치권에서 이와 같은 장애 비하 발언이 난무하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이에 정치인들은 사과하며 "비하할 의도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친구도 장애인을 비하할 의도가 아니였고 심지어 친구는 공직자도 아니며 치맥을 하는 자리는 공적인 자리도 아니었다. 하지만, 언어는 문화를 반영한다. 자신을 낮추거나 비하하고 싶을 때 그것을 장애에 빗대어 얘기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문화인가? 사적인 자리에서 친구들끼리 있는 자리라고 해서 장애인 비하가 용인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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