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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lissa Oct 28. 2023

유엔보다 더 들어가기 어려운 유엔 오케스트라

실력의 부족함을 인정하기까지..


여름은 상대적으로 회사 일이 슬로우하다. 그래서 퇴근 후 다른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많다. 스위스의 여름은 해가 길어서 거의 9시가 넘어야 서서히 어둑어둑 해진다. 물론 지금이 글을 쓰는 10월은 7시만 되면 이미 바깥은 깜깜하고 일도 언제 슬로우 했냐 싶을 정도로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특히 10월 말 - 11월 초에는 유엔에서 행정과 예산을 담당하는 The Fifth Committee (제5 위원회)가 열리기에 나한테는 일로서는 가장 중요한 달이기도 하다.


이번 여름동안 남는 시간을 어떻게 좀 더 잘 보낼 수 있을까 하다 Orchestre Des Nations에 다시 한번 지원해 보기로 결정했다.


2018년 처음 제네바 왔을 때 새로운 사람들도 만날 겸 해서 찾다가 알게 된 Orchestre Des Nations.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이고 국제기구에서 일하시는 분들도 꽤 있다고 해서 연주도 하고 네트워킹도 하면 좋겠다 싶어서 지원을 했다. (참고로 뉴욕에는 UN symphony orchestra라고 유엔에서 일하시는 분들 주인 아마추어 오케스트라가 있다고 한다.)


콘체르토 하나를 준비해서 오라고 했는데 그 말을 무시하고 그냥 그 당시에 연습하던 베토벤 바이올린 소나타를 들고 당당하게 오디션장으로 갔다. 결과는 탈락, 더 연습해서 오라는 것이었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는 항상 바이올린 연주자들이 부족하기에 나는 당연히 뽑힐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토론토에서 몇 년 동안 오케스트라 생활을 했기에 자신이 있었다.


오디션에 낙방한 뒤로 주위 사람들한테 유엔 오케스트라에 대해서 물어보니 수준이 프로급이라고 했다. 기분은 씁쓸했지만 제대로 준비를 안 한 나 자신을 탓하며 나중에 다시 트라이해야지 했는데 나도 어느새 유엔에 입사하고 코비드 시기를 지나니 벌써 5년이라는 시간이 후딱 지나버렸다.




코비드 시기에 야외활동이 힘들어지면서 캐나다에 계신 예전 바이올린 선생님과 화상레슨을 다시 시작했고 그 이후에도 지금까지 꾸준히 레슨을 받고 있는데 확실한 목표가 없이 레슨을 받으니 나의 실력도 지지부진했다.


그래서 생각난 것이 Orchestre Des Nations. 5년 만에 다시 문을 두드리며 가입 방법을 물었다. Fast movement 랑 Slow movement를 8분 정도 영상을 찍어서 보내라는 답을 받았다. 예전보다 더 까다로워진 지원 방법에 조금 당황했지만 이번 여름동안 잘 준비해서 오디션 영상을 보내보기로 했다.


목표가 생기니 연습할 이유가 생겼고 해야만 했다. 한곡은 차이코프스키 바이올린 콘체르토 2악장 (Cazonetta), 다른 한곡은 몬티의 차르다시로 정하고 7월, 8월을 연습에 매진했다. 두 곡 다 예전에 배웠던 곡들이라 악보를 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연습을 하면 할수록 테크니컬 한 면이나 음악적인 면이나 나의 부족한 부분이 더 많이 보였다. 9월 초가되었을 때 아주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나의 현 수준과 상황에서는 준비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제네바 음악원에 연락해서 피아노 반주자를 찾아 오디션 영상을 찍었다.


처음 반주자와 만나 합을 맞혀보고 나서  막상 영상을 찍기 시작하니 활이 덜덜 떨리고 음정도 불안하고 잦은 실수가 나타났다.  그래도 정해진 시간 안에 최대한 집중해서 연주하고 녹음을 끝냈다. 물론 백프로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나에게는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비디오를 보냈다.


일주일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었다. 왠지 이번에도 안된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었다. 혹시나 역시나 답장이 오기를


“We are sorry to inform you that the level you presented does not meet our requirements to join the Orchestra.”


분명히 합격보다는 탈락을 한 경험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거절의 이메일은 언제나 익숙하지가 않다. 나는 ‘아마추어 뮤지션이 이 정도면 됐지 이럴 거면 아예 프로페셔널을 모집하지’ 하면서 억울한 마음에 피드백을 달라고 답장을 보냈다. 다시 돌아온 이메일은 나에게 더 잔인하게 다가왔다.


“After careful  consideration, we have found that your level does not match our requirements. We encourage you to keep working on your skills and explore other opportunities or contact us again in the future.”



30년 넘게 연주한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의 자존심은 처참히 구겨졌지만 회사일이 바빠지면서 이 에피소드는 서서히 내 기억에서 잊혀갔다. 그러다가 최근에 회사에서 한 동료와 얘기를 하는데 그 동료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이었다.


“내가 유엔에 들어오려고 정말 많이 지원했는데 기회가 안 와서 처음에는 유엔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줄 알았어, 아님 이미 내정자가 있거나. 근데 알고 보니 그냥 내 실력이 부족한 거였더라고. 막상 입사해서 보니 학벌, 경력이 좋은 사람들이 정말 많더라. 그래서 기회가 안 온 거였어. 결국에는 나도 실력을 키우고 열심히 준비해서 들어왔지.”


그 말을 듣는데 순간 두번 낙방한 오케스트라 오디션이 떠올랐다.  내 바이올린 연주실력이 다른 아마추어들에 비해 부족한 거였는데 나는 그 단순한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던것이다. 무의식 중에 나는 내 바이올린 실력이 아마추어 레벨에서는 높다고 자만했었고 그래서 오디션을 쉽게 생각했다. 그리고 오히려 나를 뽑지 않은 오케스트라를 프로페셔널 오케스트라도 아니면서 까다롭게 굴고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정신이 맞지 않는다며 깎아내리면서 정당화를 했다.


지금 내 실력이 부족하니 더 실력을 키우면 된다는 당연한 생각은 하지 못하고 말이다.


자신의 능력을 과소 평가할 때는 자신의 가능성에 미리 한계를 긋는 위험이 있지만, 오히려 자기 자신을 과대 평가하면 롱텀으로 봤을 때 올바른 선택과 발전된 방향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객관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판단할 줄 알고 부족한 점을 인지하고 실력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다시 느꼈다.


내년 여름 다시 유엔 오케스트라에 들어가기 위해 세 번째 오디션을 보려고 한다. 이번에는 지금부터 준비를 차곡차곡해서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 한 단계 높은 실력을 갖춰서 말이다. 만약 세 번째 안되면 또 준비해서 도전한다는 마음가짐과 함께. 그리고 마지막 이메일에 적힌 조언을 받아들여 지금은 옆동네에 위치한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에 가입해서 거기서 연주하면서 실력을 닦고 있는 중이다.  


지금 활동하고 있는 동네 아마츄어 오케스트라 리허설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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