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동생이자 아이의 삼촌은 함께 할 수 없었던 여행 기록
여행의 둘째 날이자 마지막날. 1박 2일이 짧기는 하다. 여행이란 모름지기 4박 5일 정도는 돼야 여행이라 부를 만하다. 하지만 주말을 포함하면 1주일이나 회사에 안 나가는데 어떡하나. 그동안 밀린 일은 어찌할 것이며 각종 이메일과 부재중 전화는 얼마나 쌓여있을 테고, 회사일 외에도 청소며 빨래 같은 집안일이며 아이 어린이집 등하원도 문제고, 기타 이런저런 고민들이 머릿속에 밀물처럼 밀려오는 걸 보니 나는 참 '부자유한' 인간이구나 싶다. 언제쯤이면 이런 무거운 짐들을 내려놓고 해방될 수 있을는지. 일찍 떠나버린 동생은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이제 편안함에 이르렀을까.
1. 여유로운 아침(일 줄 알았던)의 보문호 산책
천년고도의 아침이 밝았다. 간밤에 잠을 설쳐 몸이 찌뿌둥했다. 여행지에 오면 매번 잠을 설친다. 아이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부터 이런다. 타고난 집돌이 성향의 아이는 잠은 무조건 집에서 자려고 한다. 그것도 꼭 자기 방에서 자야 밤 동안 깨지 않고 편히 잔다. 지난달 연휴에는 회사 동료들과 캠핑장에 갔더랬다. 엄마 없이 아빠들만, 그리고 각자의 아이들과 함께. 아저씨 넷, 아이들 다섯이 모여 즐겁게 물놀이도 하고 공놀이도 하고 숯불에 고기도 구워 먹고 수박도 잘라먹는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가고 어둠이 짙어진 때 즈음. 이제 텐트 안에 노곤한 몸을 뉘어 잠들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아이는 잠이 들 시간이 되자 무조건반사처럼 말했다. "나 이제 집에 갈래."
이런 녀석이다보니 여행지에서 잠을 제대로 잘 리가 없다. 밤새 이리 뒹굴 저리 뒹굴거리고, 가끔은 잠에서 깨서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온몸을 버둥거리다가 다시 잠들고, 벌떡 일어나 침대 가운데 자리에서 한동안 앉아있질 않나. 때문에 아이의 양 옆에서 자던 아내도 나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잠이 들만 하면 아이의 칭얼거림에 깼다. 자다가 갑자기 아이의 손발에 얻어맞고 놀라 깨기도 했다. 그래도 이른 아침의 보문호 풍경은 생각보다 근사했다. 어둠을 헤치고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는 호수를 바라보며 기지개 한 번 펴고 나니 피로가 다소 풀리는 듯했다.
아침도 먹고 산책도 할 겸 밖으로 나갔다. 여기까지 와서 조식 뷔페 따위 먹을 수는 없다. 여행을 할 때마다 현지 식당에서 매 끼니를 해결하려 한다. 이곳 숙소는 보문호 산책로에 붙어있어 마음만 먹으면 아침에 러닝 하기도 좋겠다 싶다. 그런 로망 있잖은가. 낯선 곳에서 아침 일찍 일어나 츄리닝 차림에 귀에 이어폰을 꽂고 달리는, 이런 내 모습에 내가 반해서 왠지 셀카를 찍고 싶어지는 장면. 물론 평소에는 달리기 따위 멱살 잡고 끌고 가도 하지 않는 사람이지만. 아무도 나를 모르는 여행지에서는 나 역시 평소의 내가 아닌 그동안 몰랐던 '다른 나'이고 싶은 욕망 같은 게 있다.
짧은 산책을 마치고 식당에 들어섰다. 아침은 시원하게 전복 뚝배기 한 사발 했다. 로버트 할리가 "한 뚝배기 하실래예?" 말했던 것처럼.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들어선 곳은 숙소 바로 옆에 위치한 경주전복해물뚝배기. 여기도 기대하지 않았건만 생각보다 맛이 나쁘지 않았다. 요번 여행에서는 대체로 식당 운이 좋았다.
아이는 이곳에서 홍합의 맛을 알게 됐다. 처음에는 이상한 생김새에 입을 꾹 닫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간신히 꾀어서 한 입 맛보게 하자 "아이 쫄깃해."라며 연신 포크질을 해댔다. 아이는 이렇게 아는 맛이 하나 더 늘었다. 그만큼의 세계가 더 넓어졌다. 아이의 이런 모습을 옆에서 보고 있으면 가끔 부럽기도 하다. 너는 앞으로 새로이 알아가는 즐거움이 많아서 좋겠다. 아빠처럼 나이 먹은 사람들은 어제와 똑같은 오늘,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지겨워하는데. 너는 내일은 얼마나 또 새롭고, 모레는 얼마나 더 재밌을 것이며, 그렇게 하루하루 즐거운 일들이 계속되겠지. 아이에게 그런 즐거움이 끊이지 않도록 애써야겠다. 늘 하는 부모의 다짐을 다시금 하면서 식사를 마쳤다.
2. 너무 더우니까 대릉원은 보기만 하자
아직 5월인데도 미친 듯이 더웠다. 내리쬐는 태양빛에 온몸이 녹아버릴 것 같았다. 하지만 7월 말이 된 지금 돌이켜보니 그때 더위는 더위도 아니었다. 요즘은 매일같이 가장 더운 날의 기록이 경신되고 있다. 오늘보다 더 더울 수 있나, 싶었는데 내일은 오늘보다 더 더울 거라는 뉴스를 보며 놀란다. 이것이야말로 참말로 지구 온난화로구나.
어딘가에서 그런 글을 읽은 적 있다. 올해 여름은 당신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가장 시원한 여름일 거라고. 왜냐하면 내년은 올해보다 더 덥고 후년은 내년보다 더 더울 것이며, 그렇게 지구는 계속해서 더워질 거니까. 소름 끼치는 글이었다. 그러니까 평소에 에어컨을 조금 덜 틀고, 웬만하면 대중교통을 타고,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해 소비와 쓰레기 역시 줄이는 등의 노력을 해야 하는데. 생각만 할 뿐 행동으로 옮기기가 쉽지 않다. 나의 아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즈음엔 지구가 어떤 모습일까. 아이를 키우게 되니 비로소 지속 가능성에 대한 고민과 걱정을 하게 된다. 사람이란 결국 코 앞에 일이 닥치고서야 이런다.
숙소에서 체크아웃 한 뒤 대릉원 앞 폴바셋 카페에 차를 대고 시원한 음료를 마셨다. 뭐라도 마시니까 살 만해졌다. 그제야 비로소 고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짙은 초록과 색색의 꽃들로 뒤덮인 옛 왕의 무덤들은 고운 풍경화 같은 모습이었다.
3. 교촌마을에서 이곳저곳
대릉원은 햇볕을 가려줄 그늘이 없지만 교촌 한옥마을은 다를 게다. 카페에서 거기까진 슬슬 걸어서 10분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차를 카페에 세워 두고서 광합성을 과하게 하며 걸어갔다. 아이는 걷다가 더위에 지쳤는지 안아달라 졸랐다. 내가 안았다가 아내가 안았다가 아이의 할아버지가 안았다가 할머니가 안았다가. 오늘 아주 안아주고픈 사람들이 많은, 아이에게는 복 터지는 날이다. 어머니는 손자가 귀여워서 어쩔 줄 몰라하신다. 그럴 만도 하다. 나도 내 아이가 먼 훗날 아이를 낳는다면 그 녀석이 얼마나 귀엽게 보일지. 아직 상상하기엔 이른 장면이지만 기대된다.
마을엔 이것저것 볼거리와 할 거리들이 꽤나 있었다. 8년 전에 아내와 둘이서 들렀을 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땐 오래된 한옥 몇 채를 둘러보면 그게 다인 코스였는데.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떡집에서 떡 치기 체험을 해 봤다. 아이와 함께 떡메를 잡고 들었다. 돌쇠야, 어여 쳐 보거라. 영차 어영차. "이런 찐 쌀밥 덩어리들을 열심히 치대다 보면 쫄깃하고 말랑한 떡이 되는 거야." 아이에게 설명해 주자 놀라서 눈이 동그래졌다. 밥이 떡이 된다고? 말도 안 돼, 믿을 수 없어하는 눈빛이었다. "진짜라니까. 아빠가 뭐 하러 거짓말을 하냐." 아이는 끝까지 믿기지 않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럴 때도 됐다. 이제 만으로 네 살이 된 아이는 자기만의 세계, 자신만의 인식의 틀이라는 게 생겨난 지 오래다. 제가 익히 알던 바와 다른 걸 접하게 되면 반응이 두 가지로 나뉜다. 신기해하며 받아들이거나 혹은 완강하게 거부하거나 한다. 인간의 배움이라는 게 이러한 과정을 거치는 게다. 아이에게 확실한 믿음을 주려면 끝까지 떡메질을 해서 마침내 떡이 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는데. 나의 저질 체력으로 인해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신 떡집 사장님이 아이에게 전문가스럽게 잘 설명해 주니 아이는 얼추 믿어주는 듯했다.
이번에는 수공예품을 파는 어느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가게 안과 달리 밖에는 메이드 인 차이나 인형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인형을 좋아하는 아이에게 할머니가 마이멜로디 캐릭터 인형을 사주셨다. 남자아이 치고 인형을 참 좋아하는 아이다. 아이를 키우기 전에는 이런 생각을 했더랬다. 남자는 어떻고 여자는 어떻다, 따위 성 편견을 가르치면 안 된다고. 사람은 교육으로 만들어지는 거다. 하얀 도화지에 어떻게 색칠을 해 나가느냐에 달려 있는 거야. 나름 사범대를 졸업한 사람으로서 '교육의 힘'에 대한 믿음 비슷한 게 있었다. 하지만 육아를 시작하면서부터 그 생각은 파도 앞에 쌓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부러 가르친 적 없음에도 아이는 여느 남자아이처럼 자동차 장난감을 좋아하고, 놀이터에서 땀 흘리며 뛰어놀고, 밤낮으로 크게 소리를 질러댄다. 여자 아이와는 확실히 달랐다. 교육이고 나발이고 적어도 7할 정도는 타고나는구나, 싶은 게다.
그래도 귀여운 인형을 좋아하니까 거칠기만 한 게 아니라 나름 감성적인, 여성적인 면도 있다고 해 두자.
한옥마을 내 경주 최부자댁에도 오랜만에 들러봤다. 고양이도 더워서 대청마루 아래 그늘진 곳에 몸을 뉘인 게 보였다. 한참을 둘러보고 나오는 길에 가족사진을 한 컷 찍었다. 사진을 보고 있으니 앞으로는 부모님과 함께한 사진을 못 찍겠다 싶다. 부모님과 사진을 찍을 때마다 동생의 빈자리가 계속 느껴지는 탓이다. 즐거운 여행 가운데서도 문득 치밀어 오르는 슬픔을 어찌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점심밥은 교촌마을 내 진수성찬이라는 식당에서 먹었다. 여기도 별생각 없었는데 먹을 만했다. 이번 여행의 식당은 모두 성공적이었다. 전 타석 안타를 친 타자의 기분으로 밥을 먹었다. 게살과 육회 비빔밥, 불고기, 미나리전까지 배부르게 먹었다.
미나리를 보며 어머니가 아내에게 말했다. "느이 남편, 어릴 때 진짜 밥을 안 먹었는데 봄만 되면 미나리를 그렇게나 잘 먹었다. 참기름에 무쳐서 주면 밥 한 그릇 뚝딱 비웠다." 그러고 보니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어릴 적 나는 밥 먹는 걸 무척이나 싫어했지만 봄에 나온 제철 미나리는 이상하게 내 입맛을 돋웠다. 봄철에는 밥 때는 물론이고 야식으로도 미나리 비빔밥을 먹곤 했다. 봄 미나리를 마주하면 나는 어머니가 생각나고, 어머니 역시 큰아들이 생각나시는 것.
그나저나 우리 아이도 밥을 참 안 먹는다. 밥상머리에서 깨작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속에서 천불이 나면서도 동시에 부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든다. 나도 어릴 때 똑같았으니까. 애가 밥을 안 먹는 게 이렇게나 스트레스받는 일이군요. 어머니 아버지, 죄송했어요.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아내는 밥 한 숟가락을 한참이나 씹고 있는 부자의 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쉰다. "나는 어릴 때 밥 되게 잘 먹었는데 너네는 왜 그러냐 대체. 아빠 닮았구먼. 아빠가 문제였어, 아빠가."
4. 경주 안녕
렌터카는 처음과 마찬가지로 끝날 때에도 경주역 공영주차장에 댔다. 주차 위치를 사진 찍어서 보내니 반납 절차가 끝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비대면인 렌트는 처음이다. 이게 제대로 반납한 게 맞는지 긴가민가하면서 KTX 열차에 올랐다.
기차에 다 같이 탔다가 부모님은 동대구역에서 내려서 진주행 열차로 갈아타셨다. 우리는 기차에 계속 탄 채로 서울까지 왔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금세 다시 이별이다. 하지만 우리는 언젠가 또 만날 테니 그리 슬퍼할 일은 아니다. 아이는 서울 즈음까지 와서 제가 아는 풍경이 열차 창 밖으로 보이자 입이 헤벌쭉 벌어졌다. 나는 서울이 좋아, 이러면서. 누가 보더라도 서울에서 태어난 영락없는 서울 아이다. 저 놈 저거, 언제 한번 영화 <집으로>처럼 시골에 보내서 한두 달 살게 해야 서울촌놈 티를 벗을 텐데. 서울깍쟁이처럼 자라면 안 되는데. 너무 도시아이처럼 자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부모님과 자주 여행하고프다. 새로운 곳을 구경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재미난 것도 하고 손주 재롱도 곁들여 보여드리면서. 그러면서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 동생 때문에 마음 한편이 아려서 자주 보고 싶지 않기도 하다. 어느 한 편을 들어줄 수 없는 양가적인 생각이 드는 가족 여행이었다. 대체 가족이라는 건 뭘까. 이런 관계 역시 나를 구속하는 하나의 지긋지긋한 올가미 같은 건 아닐까. 아니면 나의 삶을 지탱하게 하는 하나의 단단한 버팀목 같은 걸까. 쓸데없는 생각이 많은 여행이었다. 1박 2일이라는 주어진 시간 동안 그저 즐거웁고 감사하면 되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