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가기 전에 단 하나의 영화를 볼 수 있다면
이 영화는 로드 무비이다. <Knockin’ on Heaven’s Door>와 더불어 로드 무비 장르에서 내가 좋아하는 작품이다. 두 영화 다 주인공의 마지막 여행이라는 점이 끌림을 만들어 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군가 당신에게 ‘마지막으로 여행을 떠난다면 어떤 여행이 되었으면 좋겠냐’고 묻는다면 영화 한 편을 볼 시간을 달라고 요청하길 바란다. 이 글이 일말의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
델마는 18살에 결혼을 해서 대릴이라는 철부지 남편과 함께 사는 전업주부다. 대릴은 자기가 철이 없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남자다. 그는 델마를 가구처럼 생각한다. 그가 원할 때 밥을 차려주고, 스포츠 경기를 볼 때 가만히 있고, 집에 돌아왔을 때 반겨주길 원한다. 그리고 말은 시킬 때만 했으면 한다. 버튼을 누를 때와 취사가 완료되었을 때만 입을 여는 밥솥 같은 여자를 원했던 것 같다. 델마가 루이스와 몰래 떠난 여행에서 ‘돌이킬 수 없는 사건’이 발생한다. 델마는 경찰이 알아챘는지 확인하기 위해 대릴에게 전화를 건다. 경찰은 위치를 추적해야 하니 아내에게 상냥히 말해 최대한 전화를 오래 끌어달라고 부탁한다. 대릴은 시키는 대로 평소와는 다르게 “HELLO, THELMA!”라고 반갑게 외친다. 델마는 바로 전화를 끊고 루이스에게 경찰이 있다고 말한다. 그동안 그가 델마를 어떻게 대했는지 짐작하게 하는 명장면이다.
3일 전만 해도 이런 짓은 꿈도 못 꿨어요. 내 남편을 보면 이해가 갈 거예요. (…) 트렁크에 들어가세요.
제발, 처자식이 있는 몸이에요.
그래요? 행운이네요. 잘하세요. 특히 부인한테요. 날 이렇게 만든 건 남편이거든요.
과속 단속으로 경찰에게 걸리자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델마가 경찰에 총을 겨누며 하는 대사 중 일부다. 3일 전만 해도 델마와 루이스는 자유를 만끽하기 위해 휴가를 떠났다. 식당에서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루이스는 휴가를 냈고, 델마는 남편에게 편지 한 장만 남긴 집을 채 나왔다. 하지만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건이 생긴다. 사건 직후 델마는 남편에게 전화를 걸지만, 대릴은 그녀의 상황은 듣지도 않고 화를 내며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고 명령한다. 델마는 결국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집이 무너지지 않으면 언제든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 자신을 가구처럼 생각한다면 집을 무너뜨려서라도 탈출하는 것이 낫다.
루이스에게 상처가 있다. 델마가 그 상처를 끄집어 내려 할 때 루이스는 절대 그 얘기는 꺼내지 말라고 말한다. 단호함을 넘어 결연한 그녀의 태도에 관객은 우회적으로 그녀의 상처를 유추할 수밖에 없다.
아마도(어쩌면), 그녀는 텍사스에서 살았던 어린 시절에 누군가에 의해 강간을 당했다. 그런데 루이스는 그 누군가와는 알던 사이였고, 그 때문에 경찰은 강간이 아닐 수도 있다고 판단한다. 목격자도 없고, 뚜렷한 증거도 없다. 강간범은 괜한 시간을 허비했다는 듯이 루이스에게 ‘그냥 그 자리에서 끝내버릴걸’이라며, 그녀를 조롱한다. 아니면(아마도), ‘내 거X기나 더 빨아볼래?’라며 모욕했을 것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어린 시절의 루이스는 상처를 안고 강한 여성으로 성장한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보이는 모습일 뿐이다. 인간이라면 언제나 강할 수는 없다. 그녀는 자신을 사랑하는 지미가 약혼반지와 함께 가져온 전 재산을 강도에게 빼앗겼을 때 아이처럼 운다. 그녀는 델마를 겁탈하려는 남자에게 총을 겨눌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경험한 상처를 떠올리며 ‘델마’와 ‘어린 시절의 나’를 위해 방아쇠를 당길 줄 아는 여성이다. 하지만 사랑하는 연인과 맞바꾼 돈을 잃어버렸다는 걸 깨닫게 되었을 때 루이스는 누구보다 아파한다.
루이스를 보면 사람이 일생을 안고 살아가는 상처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든다. 상처는 손가락으로 눌렀을 때 통증이 느껴지지 않을 때가 되면 짐이 된다. 그리고 평생 그 사람을 따라다닌다. 여행을 떠나면 그 짐을 버릴 수 있을까? 아무 데나 버릴 수 없는 그 쓰레기 같은 짐을 버리기 위해서는 절벽에서 차를 타고 뛰어내릴 정도의 용기가 필요하다. 루이스는 그런 짐이 델마에게 생길까 봐 대신 살인자가 된다. 그녀가 절벽에서 뛰어내렸을 때, 그녀가 평안하길 바란다.
델마와 루이스는 살인자와는 거리가 멀다. 강도 짓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그들이 주변 사람들에게 멕시코에 간다고 했다면 여행 잘 다녀오라고 인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사람을 죽이고, 권총 강도로 돈을 빼앗고, 경찰들을 피해 멕시코로 향한다. 그들은 인생에 어느 지점에서 일탈하고만 걸까?
어쩌면 그건 일탈이 아니라 회복이었을지도 모른다. 델마는 강도에게 속성 과외를 받고 단번에 권총 강도에 성공한다. 경찰한테 총을 겨눠 트렁크에 들어가라고 명령할 정도로 대범하고 침착하다. 우스갯소리로 루이스에게 천직을 찾았다고 말하기도 한다. 루이스는 수십대의 경찰차가 쫓아오는 상황에서도 그들을 따돌릴 정도로 운전을 잘한다. 그리고 경찰이 위치추적을 시도할 거라는 것도 미리 알아차린다. 델마가 강도 짓을 잘하고, 루이스가 경찰의 추적을 잘 따돌린다고 해서 그녀들이 원래 그런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여행의 재미 중 하나이고, 망가진 일상으로부터 회복되는 과정이다.
델마는 대릴에게서 벗어나 처음으로 여행을 만끽하고 오르가슴까지 느낀다. 루이스는 과거의 상처를 목격하고 그때 하지 못했던 복수를 조금이나마 성공한다. 그리고 지미를 통해 자기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너무 아름다워.
정말 그렇다.
이렇게 여행해 볼 기회가 없었어.
지금 하고 있잖아.
마지막으로 치닫는 도망 길에 아름다운 주변 풍경을 보고 루이스와 델마가 나누는 대화다. 잠시 내려서 구름에 감춰진 태양을 쓸쓸히 바라보는 루이스의 표정에서 그들의 여행이 희망으로 끝나진 않을 거라는 예상을 하게 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녀들의 여행이 무사히 일상으로 이어지기를 보는 이들이 응원하게 만든다. 그런 놈은 죽여도 괜찮고, 그런 인간과는 헤어져도 괜찮다고 말이다. 인생은 영화가 아니기에 델마와 루이스가 떠난 일상으로의 회복 여행은 간접 경험 하는 걸로 만족해야 할지 모른다. 하지만 인생이 여행이 될 수는 있다. 걷다 보면 내가 원하는 곳이 어딘지 알게 되고, 많은 짐을 짊어지고 가다 보면 꼭 필요한 짐이 무엇인지 알게 되고,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함께하고 싶은 사람을 알게 된다. 여행을 가기 전에 좋아하는 로드무비 하나쯤은 만들고 떠나자.
감독 리들리 스콧 / 각본 캘리 쿠리 / 배우 수잔 서랜드, 지나 데이비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