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계에 서면 내가 마치 영웅이 된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트래비스는 베트남전에서 돌아와 불면증에 시달린다. 이왕 불면증에 걸린 거 밤시간을 활용해 돈이나 벌어보자며 택시 운전을 시작한다. 느긋한 성격에 긍정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한 여자를 만나게 되면서 바뀐다. 이 영화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여자에게 차이고 복수를 위해 총을 들었던 사내는 차마 용기가 없어 엉뚱한 곳을 겨냥하는데, 우연찮게 어린 소녀를 구하고 영웅이 된다.
아마 1970년대 였기에 트래비스가 영웅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50년 가까이 흐른 지금은 여자에게 차였다고 그녀가 지지하고 있는 대선 후보를 저격한다는 발상은 그저 이입을 방해할 뿐이다. 이 영화의 영향을 받았다는 조커(2019)는 시대를 반영해 아서가 사회에서 버림받는 과정에 좀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는 점과 비교해 보면 더 명확해진다. 트래비스가 누군지는 택시기사가 되는 과정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는 평범하다 못해 그 어떤 목적도 없는, 세상에 우연히 떨어져 살아가는 사람 그 자체이다.
“이 일을 택한 이유는?”
“불면증 때문에요”
“포르노 영화라도 보지. 현재 하는 일은?”
“밤새 돌아다니며 지하철, 버스를 타느니 택시를 몰아보려고요”
“밤에 빈민가에 갈 수 있나?”
“언제 어디든 괜찮아요”
“휴일 근무는?”
“상관없어요”
“건강 상태는?”
“좋아요”
“나이는?”
“스물여섯”
“학력은?"
“별로… 말할 게 없어요”
“병역은?”
“73년 5월 명예 제대”
“육군이었나?”
“해병대요”
“나도 해병대였네 파트타임으로 하겠나? 올빼미로 하겠나?”
“근무 시간이 길었으면 하는데요. 올빼미가 뭐죠?”
“이거 작성해서. 내일 아침 가져오게”
도시가 커지면 커질수록 중심과 주변부는 보이지 않는 경계가 형성된다. 이 경계를 유일하게 드나들 수 있는 자들은 택시드라이버다. 트래비스가 태우는 손님들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부유한 사람들이 술 먹고 집에 들어가거나 창녀나 흑인과 같은 슬럼 지역의 사람들이 새벽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도 택시를 이용한다. 트래비스는 차별없이 모두 똑같이 태우고 제자리로 되돌려 놓는다. 하지만 경계는 흐릿해지지 않고 더욱 진해진다. 대선 후보도 경계를 무너뜨리는데 관심이 없다.
영화 중반 트래비스가 베티와 데이트를 하게 되는데 이때 그녀를 경계 밖, 즉 포르노 영화관으로 데려오면서 무시 당하게 되고 이를 통해 경계를 깨닫게 된다. 이에 트래비스는 경계를 허물기 위해 총을 든다. 참고로 같은 감독의 2019년 영화 아이리시맨에서 로버트 드 니로가 맡은 프랭크 시런도 삶의 전환점에서 총을 드는데 세월이 느껴져서 흥미롭다.
물론 앞서 기술한 것과 같이 트래비스가 총을 든 건 경계를 허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베티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다. 다만 경계 안쪽 사람들이 봤을 때, 크래비스는 경계를 허물기 위해 영웅이 된 남자인 것이다. 경계 안쪽 사람들이 봤을 때, 경계 밖의 위험한 인물(조직의 보스)을 제거했기 때문에 영웅이 되지 못할 이유가 없다. 물론 이 또한 그들의 가십으로 잠시 화제가 됐다가 원래대로 돌아온다.
영화 마지막 장면에 트래비스가 여전히 택시를 몰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세상은 여전히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헌신하겠다는 경계 안 정치인들로 들썩이고, 길거리에는 문제를 직접 경험하는 경계 밖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리고 경계를 오가며 가십을 통해 먹고사는 이들도 존재한다.(트래비스의 동료들은 만나기만 하면 자기 구역에서 발생한 가십을 나눈다. 트래비스는 그런 대화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 한다.) 영화 속 주인공처럼 우연히 영웅이 탄생하며 세상은 소란스러워진다. 그런데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문제가 영웅으로 감춰지기 때문에 더욱 분주한 건지도 모른다.
감독 마틴 스콜세지 / 각본 폴 슈레이더 / 배우 로버트 드니로, 시빌 셰퍼드, 조디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