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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찬찬 Jul 18. 2021

나의 필요를 내게 일러준다

수료 전 마지막 일정이었던 학회 발표는 결국 나의 무능함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끝이 났다. 나를 평가하고 비난하고 위축시키는 목소리를 스스로 만들어내 한 학기 내내 그것에 쫓겨 다녔고 안그래도 부족한 자신감은 이제 소멸 직전에 이르렀다. 위기 대응 매뉴얼을 수도 없이 다듬고 고쳐봤지만 단단하지 않은 마음에는 무용지물이었다. 제자리걸음만 했다는 생각이 드는 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왔기 때문일 거라고, 숨이 트이는 생각이 잠시 다녀가고 나면 공허했다.


작년 봄까지만 해도 내가 쓸모없게 느껴질 때면 이성을 잃고 공부따위 때려치우면 그만이라 생각했지만, 그만두고 다른 데로 갈 용기가 없다는 걸 잘 아는 지금은 같은 위기에 부딪힐 때마다 또렷한 정신으로 침착하게 생각한다. 이런 식혜 위의 잣 같은 인생. 친구는 기운이 쏙 빠진 내게 이런 카톡을 보냈다. "망할 인생!!!!!!!! 뭐 하여튼 시작하면 사람을 연쇄적으로 갈군다니까!!!! 형체가 있는 새끼였으면 인생은 나한테 이미 뒤졌어..." 한참을 웃었다. 고통이 다른 무엇으로 승화되는 순간들이 나는 가장 슬프고 또 이렇게 웃기다.


올해만큼 각종 어두운 생각들을 다채롭게 했던 시기가 없는데, 그 생각을 하나하나 기록해두지 못한 게 이 와중에 아쉬운 걸 보면 아직 완전한 바닥은 아닐 것이다. 1월까지 써야 하는 글을 생각하며 나의 필요를 내게 일러준다. 나쁜 생각들과 거리를 두고, 고마운 사람들과 가까이서 멀리서 함께 따듯한 겨울을 보낼 것이다.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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